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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1/04/0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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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1/03/28 계란말이
  10. 2010/09/13
2011/10/26 00:20 Sloppy Fixation
진디





“...저기,”

선호가  옆에 있는 물병 좀 달라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분명함에도 충재는 돌아보지 않는다.

맞은 편에 앉은 동완이 진아, 하면서 눈치를 주는데도 충재는 대꾸도 않고 제 앞에 잔만 연거푸 비운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었다. 저한테 선호는 끔찍하게도 귀여운 동생인데 선호에게 저는 그냥 동네형 나부랭이만도 못해서 십몇년동안 형소리 한번 못 들은 것이 못내 억울한 거다. 

“야 야, 그건 아니지.”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민우가 말을 꺼내려는 걸 동완이 말리려는데 접때 언제야, 술게임할 때 니새끼가 우리한테 다 형형거리게 만들어 가지고 앤디가 형 했냐 안했냐, 말을 이미 뱉었다. 민우가 말하는 접때, 는 충재 생일이었고 술게임에서 충재의 청대로 생일맞이 야자타임 중이었다. 

“아 시발. 진짜 그 이야기는 하지 말라니까!”

그러니까 박충재씨의 이론에 의하자면 야자게임은 서열을 위에서 아래로 몽땅 뒤집는 거니까 막내인 선호가 자신에게 형이라고 부르면 안 됐다는 거다. 평소에 저를 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더욱더 명명백백해진 그날 두배로 서러웠던 충재는 결국 병나발을 불다 드물게 술 먹고 실려가버리기까지 했던 그 사건을 하필 민우가 끄집어낸 것이다.

선호의 입장에서 보면 제 친구들이 대부분 80년생들이기도 하고 또 그 무리가 충재의 친구들과도 일부 겹치다보니 족보가 꼬이는 것도 불편하고 팀으로 묶이면서 막내로 입지가 굳어지긴 했어도 연습생 시절엔 야자하던 친구에게 형소리가 쉽게 나오지는 않을 테다. 다만 충재는 연습생 시절에도 선호가 ‘너무’ 귀여운 친구였다가 신화의 막내가 되고 보니 이놈의 막내가 형형 하면서 부리는 애교가 저도 고파진 거다. 게다가 카메라가 돌 때는 그럭저럭 저한테도 (가뭄에 콩나듯이긴 하지만) 매달리고는 하다가 카메라가 나가는 순간 찬바람 쌩쌩이라니 그게 아직까지도 영 섭섭한 모양이다.

“야, 선호는 나한테도 이새끼저새끼 찾는 거 모르냐? 쟤는 원래 에릭 빠돌이잖아.”

동완이 위로를 한다고 하는데도 충재는 화를 풀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다. 몇 년에 한번씩 충재는 이럴 때가 있다. 어디 가서 무슨 소리를 듣고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달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아 됐어. 담배나 피고 올래.”

왁자지껄한 고깃집에서 나와서 끄아아- 부러 큰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쉬니 허연 입김이 담배연기처럼 눈앞을 어지럽힌다.

‘왜 선호는 나를 형으로 생각해주지 않을까. 키도 크고 멋있는데. 역시 재력이 에릭형한테 밀려서...?’

복잡한 마음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잡히는 게 없다. 담배를 식당 안에 두고 나온 모양이다. 아, 정말 되는 일이 없으려니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팔을 툭 친 손이 담배갑을 내민다.

“어, 선호야.”

“담배 핀다는 사람이 담배를 두고 나가냐.”

충재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건네받은 담배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자 선호가 나도 줘 하고는 물려 달라고 고개를 내민다. 그러니까, 달랑 다섯 달 차이라는 생년월일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 아닌데 이렇게 아기처럼 둥근 눈이라던가 붉고 통통한 입술이라던가 하얗고 토실토실한 볼을 보면 아무래도 동생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새롬이만큼 귀여운데. 어쩔 땐 애교도 더 많고.

후우- 

능숙하게 담배연기를 내뱉은 선호가 어깨를 툭 치길래 쪼그리고 앉아 애꿎은 땅만 헤집던 충재가 고개를 돌렸는데도 선호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다.

“잘 생기고 키도 큰데 형이기까지하면 억울하잖아. 그래서 못하겠어. 이해 좀 해줘.”

한참 만에 말을 꺼낸 선호가 비싯, 웃더니 툭 담배를 튕겨서 벽에 맞추고는 아 춥다 들어갈래- 하고는 엉덩이를 털면서 일어난다.

“아으... 진짜 이길 수가 없네, 이선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충재도 몸을 일으켜 세운다.

“야- 같이 들어가자, 친구야.”

평소 같았으면 얼른 밀쳐냈을텐데 어쩐 일로 오늘은 어깨에 팔을 둘러오는 충재를 선호는 뿌리치지 않는다. 

오랜만에 함께 하는 밤. 에이, 뭐 형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싶은 기분이 잠깐 들었던 충재는 다시 조금 섭섭한 마음이 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에 형 답게 점잖게 대처해야지, 하고 다짐한다.






_
앤디리 전역이 가까워오는데 요즘 유승호 때문에 정신 못차리는 것이 문득 죄스러워서(?) 급 망상.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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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신화, 진디
2011/09/18 19:30 Sloppy Fixation

'하드' 플레이





'으... 드디어 숙소다...'

하루종일 계속 되는 촬영을 마치고 홀로 녹음실로 가 개인 파트 녹음을 하고 숙소에 돌아온 시간은 새벽 네시 이십칠분. 아침해가 뜨기도 전 파란 새벽에 숙소를 나섰으니 꼬박 하루를 혹사 당한 셈인 진기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지만 습관처럼 신발장에 놓인 신발의 개수를 확인한다. 형형색색의 슬리퍼들 사이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가벼워보이는 검은색 스니커즈 한켤레.

종현이는 야구 보러 한국에 잠시 들어갔고 민호는 오늘 창민이형 숙소에서 자고 온다고 문자가 왔었다. 기범이는 금새 또 어디서 사귄 친구들과 놀고 있을테고, 하루종일 태민이 혼자 숙소에 있었겠구나. 조금 미안한 마음과 함께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만 태민이가 얼마나 단단한 아이인지, 또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괜한 걱정은 그만 두기로 한다.

"태민아, 여기서 뭐해?!"


얼른 씻고 자야겠다는 생각에 현관에서 화장실까지 걸어오며 허물 벗듯 옷을 하나씩 벗어제끼고 브리프 차림으로 화장실 문을 연 진기는 옷을 다 입은 채로 욕조 안에서 느슨하게 턱을 걸치고 하드를 물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고깔까지 쓴 태민을 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형 기다렸어요."

왜? 날? 여기서? 어째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뒤로 하고 진기는 일단 칫솔을 들고 치약을 짠다. 후후- 평정심. 후후- 마인드컨트롤.

"조금 있으면 스케줄 가야하는데 얼른 자야지."

칫솔을 입으로 집어넣으려는데 태민이 단단한 손가락으로 팔목을 잡아 제 얼굴쪽으로 잡아당긴다. 태민에게서 달큰한 냄새가 진동을 해서 진기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형 생일이니까 좀 늦게 자도 괜찮아요."

"무슨 소리야. 내 생일은 12워....."

피식 웃으면서 대꾸하는 진기의 말을 막은 건 방금 전까지 태민이 입가를 요란하게 장식하며 물고 있던 그 하드다. 달짝지근한 바닐라맛에 초콜렛 범벅이 된. 냄새만큼 맛있지는 않네, 진기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숙소에 우리 둘만 있는 날은 다 형 생일이에요."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진기의 앞으로 바짝 다가온 태민이 다시 진기에게 물려주었던 하드를 빼앗아 제입에 쏙 밀어넣으면서 한쪽 눈을 찡긋한다. 뭐랄까. 늘 자신을 노리는 듯한 맹수의 시선을 느껴오고는 있었지만 그게 태민으로 부터였다니. 진기는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맛있어요?"

"으응..."

"만약에 이런 거 말구우- 형한테 더 맛있는 게 있으면 나 줄 거에요?"

"응?"

더운 날에도 서늘한 태민의 손이 얇은 브리프 위에 와닿자 진기가 잔뜩 몸을 움츠린다.

"줄 거냐구요."

"저... 태민아...?"

"줄 거죠."

"...어... 있으면 줘야지, 우리태ㅁ... 어, 저, 태민아?!"

진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태민이 아이스크림은 세면대 안으로 던져넣어 버리고 중심에 차가운 입술을 갖다대는 바람에 잔뜩 놀란 진기가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이내 태민의 모래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고는 신음을 흘린다.





"형."

나란히 침대에 누워 나른한 기분으로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매던 진기가 태민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으응 하고 대답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플레이를 해야되는 거에요. 그냥 좀 정상적으로 하면 안 되요?"

조금 귀찮은 듯한 태민은 ...그래두 이런 게 재밌잖아... 하고 만족스럽게 대답하는 진기의 목소리를 듣고는 한숨을 포옥 쉰다.

"다음번에도 기대할게.♡"

비몽사몽 간이라 더 달콤한 목소리로 잘도 저런 말을 내뱉은 진기는 금새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잠이 들고, 되려 말똥말똥 말짱한 정신이 된 태민은 다음번 레파토리를 기획하느라 오늘도 뜬 눈으로 밤을 샐 것 같다.









_너무 대놓고 누나들에게 바치는 컷이 아닐 수 없지만 낚이지 않을 수도 없구만. 이젠 애증도 아니고 오로지 경이로울 뿐인 oh oh 에쎔의 기획력 oh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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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탬뉴
2011/09/02 19:20 Sloppy Fixation
두준요섭준형






비 오는 거릴 걸었어
너와 걷던 그 길을
눈에 어리는 지난 얘기는
추억일까


다리가 부러져 외출이 쉽지 않은 요섭은 요즘 저렇게 집 지키는 강아지 마냥 베란다에 기대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깥 세상만 보고 앉은 일이 잦다. 좀 불쌍한데 조그만 녀석이 풀이 죽은 모습이라는 건 꽤 귀엽기도 해서 두준은 문자 하는 척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소파에 풀썩 엎드려 요섭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좁은 원룸에 사내애들 여섯을 우겨넣어뒀으니 그걸 못 견딘 현승은 연습실로, 동운은 제 집으로, 기광은 헬스장으로 대피하고 갈 곳 없는 요섭, 만사 귀찮은 준형 그리고 두준까지 셋만 숙소에 남았다. 사실 두준은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축구를 할 예정이었지만 막상 나가려니 어쩐지 기분이 내키지 않아 연습을 핑계로 약속을 취소했다.

"준형아, 밖에 놀러가자."

요섭이 기브스를 한 다리를 질질 끌며 들어와 거실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준형을 부르자 준형은 스윽 고개를 들어 베란다로 난 커다란 창을 흘끗 본다.

"비 올 것 같은데."

다른 말로 하면 싫다는 말. 숨쉬기 운동을 제외한 모든 움직임을 귀찮아하는 준형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숙소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패션에 민감해서 옷과 신발이 젖는 흐린 날은 더더욱 질색을 하는 것이다. 운동을 싫어하는 것은 요섭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제가 잘 못하기 때문에 싫어할 뿐 기본적으로는 활동적인 편이다. 얼마 전 다리가 부러진 것만 해도 괜히 헬스광인 기광을 따라나섰다가 일어난 일이었던 것이었다. 도대체 헬스장에서 어떡하면 다리가 부러지느냐고 한동안 놀림감이 되었고 준형으로부터도 그러길래 집에 가만히 있으라니까, 하고 한소리를 들은 차라 기가 죽었는지 잘라 말하는 준형을 향해 잠시 입술을 비죽였을 뿐 더는 닥달하지 않는다. 다시 베란다로 나가 처량하게 난간에 턱을 걸치고 엉거주춤하게 선 요섭의 굽을 등을 쓱 보고 고개를 돌리다 두준과 시선이 맞부딪힌 준형이 서둘러 고개를 숙인다. 아무래도 요섭이 신경이 쓰이는 것은 분명한데 나가잔다고 냉큼 같이 나가주기가 민망한 모양인듯 했다. 둘이 사귀는 거 같은 숙소 사는 연습생들끼리는 다들 아는 일인데 새삼스럽게 굴건 또 뭔가 싶지만 그게 용준형이니까, 생각한 두준은 몸을 일으켜 식탁 위에 던져둔 지갑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으며 양요섭, 하고 부른다.

“나랑 나갈래? 나 담배 사야 되는데.”

준형의 옆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애꿎은 기브스를 잡아뜯던 손가락을 멈춘 요섭이 그럼 떡볶이도 먹자, 반색을 하며 덜그럭덜그럭 다친 다리를 불안하게 끌며 뛰어온다. 역시 너밖에 없어, 하면서 어깨에 엉기는데 준형이 스윽 쳐다보는 시선이 민망해서 너 그러다가 붙던 다리 다시 부러진다, 말을 돌린 두준이 옷방으로 간다. 뭐 입지 고민하는 새 요섭은 벌써 구겨진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옆에 섰다. 둥둥 걷어올린 트레이닝복 바지에 애니메이션 프린트가 들어간 상의를 입은 요섭은 누가 봐도 중학생, 많이 봐줘야 겨우 고등학생이라고 우길 수 있을 만한 모습이다. 한 해 늦게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생일은 딱 육개월 차이인데 이렇게까지 발육상태가 차이가 나다니. 생긴 것도 좀 외계인 같고 콩알만한게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하는 것이 아무래도 지구인은 아니지 싶다.

"준형아, 올 때 뭐 사올까."

신이 나서 설치다가 막상 나가려니 미안한 모양인지 요섭이 조심조심 묻는데 준형은 이어폰을 꽂은 채로 안 들리는 척 어설픈 연기를 한다. 고막에 안 좋다고 볼륨 작게 해서 듣는 거 다 아는데 그래도 요섭은 속아주는 척 하느라고 대답없는 준형의 등을 보고만 섰다. 

“야, 용준형.”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둥그렇게 뜬 요섭의 눈이 안쓰러워서 준형의 한쪽 이어폰을 잡아당겼다. 뭐 사다줘? 물으니까 준형이 콜라- 입모양으로 대답하며 신발장에 기대어 엉거주춤하게 신발을 신고 있는 요섭을 스윽 훔쳐본다. 

"우산 챙겨."

그야말로 모기만한 목소리라 이번에는 요섭이 듣지 못한다. 저렇게 신경 쓰일 걸 그냥 같이 가주지. 그래도 그런 말을 하면 자존심 상해 할테니까 두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으, 비온다!"

먹먹한 하늘이 아무래도 불안하더니 담배와 콜라를 사서 편의점을 나오는데 기어이 세찬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뛰어가면 숙소까진 금방이지만 다리가 부러진 요섭을 데리고는 무리라고 판단한 두준이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문다. 아끼는 트레이닝복 바지 끝단이 다 젖어서 조금 짜증을 부리니 요섭이 미안한지 고개를 푹 숙인다. 괜찮아, 뭐 말리면 되지, 하고 웃어주니 금새 표정을 풀고 나란히 두준의 옆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처마 밖으로 손을 뻗는다. 얼굴보다도 커다란 손바닥이 새삼 신기하다. 두준은 콜라만 마시고 운동도 안하는 주제에 비쩍 마른 용준형이나 신체비율이 기묘하게 뒤틀린 양요섭이나 다들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비오는 날 좋던데."

"신발이랑 옷 젖는다고 그러는 거지 뭐. 폼생폼사잖냐."

같이 나오지 않은 준형이 아무래도 섭섭한 모양인지 시무룩한 요섭을 위로할 요량으로 말을 꺼내보지만 그다지 효력이 없는 모양이다. 착한 니가 이해해야지 어쩌겠냐, 너무 섭섭해하지마. 두준의 말에 요섭은 흙탕물에 손가락을 담궜다 뺐다 어린애같은 장난을 치다 한숨을 포옥 쉬고는 두준을 바라본다.
  
“두준아.”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습관처럼 두준은 응, 하고 대답한다. 야, 혹은 윤두준, 하고 부르는 보통 녀석들과는 다르게 늘 다정하게 두준아, 하고 부르기 때문인지 이새끼저새끼가 입에 붙은 두준도 요섭만큼은 그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다.

"왜. 불렀으면 말을 해."

뭐가 이렇게 심통이 났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통통한 볼살을 툭툭 건드려도 요섭은 한참을 말이 없이 시무룩한 표정 그대로다.

“너, 준형이 좋아하지.”

쿠궁.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때마침 둘의 앞으로 택시가 요란하가 물을 튀기며 지나간다.

"아이씨,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태연한 척 엄한데 화풀이를 하며 담배 상자의 비닐의 벗기는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겨우 한가치를 꺼내어 입에 무는데 요섭의 시선이 느껴져 왼쪽 귀가 화끈거린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준형도 알고 있을까. 여러가지 의문과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필터를 길게 빨아들였다. 가슴도 머릿속도 부옇게 담배연기로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준형이는 몰라. 걘 사실 똑똑한 척만 하는 바보잖아."

요섭이 하얀 운동화 코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한다. 준형이 봤으면 질색할 일이다. 하얀 운동화에 때 탄다고. 뭐, 자기 신 아니면 아무말도 안 하겠지만.

"준형이랑 사귀니까 너한테 미안하더라."

잔뜩 움츠러든 어깨 때문인지 가뜩이나 조그만게 더 쪼그매보인다. 얘는 아무래도 새끼 고양이같다. 손바닥만해가지고 가르릉가르릉 거리고 보들보들한. 작은 동물같은 거 귀찮아서 키우지는 못해도 귀여워 못 견디는 두준은 거친 사내애들 속에 섞인 요섭이 늘 눈에 밟혔다. 돌이켜보면 준형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래서였다. 늘 안 그런 척, 무심한 척 하면서 요섭의 옆에서 잔소리를 하기도 하고 챙겨주기도 하는 준형이 있었던 것이다. 시작부터가 잘못 됐다. 용준형 마음이 양요섭한테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좋아하기 시작했으니. 하지만 마음이라는 게 멋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딱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뭐 그게 미안할 일이야."

"그렇긴 한데, 그래도."

잦아드는 목소리와 함께 푹 꺾이는 고개가 처량해서 어깨동무를 하고 요섭을 꽉 끌어당겨 안았다.

“바보야, 니가 울면 어떡하냐?!”

미안해서 그러지, 하고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병신같은놈아, 욕을 해야될텐데 요섭한테는 어쩐지 그게 되지를 않는다. 준형이는 그래서 요섭이를 좋아하는 걸까. 좋아할 수 밖에 없어서. 그런데 나는 왜 병신같이 요섭이가 아닌 용준형을 좋아하는 걸까 생각하며 두준은 요섭을 토닥인다.

"그냥 비 좀 맞고 떡볶이 사서 들어가자. 준형이도 같이 먹게."

두준의 말에 요섭이 눈물을 훔치며 덧붙인다. 순대랑 오뎅두. 

“응.”

두준은 대답과 동시에 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서서 요섭에게 손을 내민다.

내가 여자애도 아니고, 툴툴거리면서도 두준의 손을 잡고 영차, 하며 몸을 일으킨 요섭이 베시시 웃는다. 접힌 눈꼬리에 달라붙은 눈물을 두준은 닦아줄까 하다가 그냥 둔다. 조금 울어도 행복하겠지. 네가 기쁘다면, 그래서 준형도 행복하다면 그걸로 되었다 생각하고는 제가 생각해도 너무 닭살이라 두준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앞장을 선다.





_
한참 전에 쓴 거라서 포텐이 터진 지금(...) 보니 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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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7 23:53 Sloppy Fixation
릭완디








“오랜만이다.”

잔업이 밀려 눈치를 보다 약속 시간보다 한시간이 지나 도착한 포장마차 안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안 봐도 뻔했을 전개에 동완은 꺼칠한 얼굴을 훑으며 선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단 맑은 액체로 채운 잔을 부딪히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를 건배를 외치는데 셔츠 소매 밑으로 반짝거리는 정혁의 시계가 눈에 띈다. 얼마전에 기고했던 잡지에서 본 모델이었다. 돈이 있어도 연줄이 없으면 구할 수가 없다며 트렌드에 목을 거는 에디터가 페이지를 펼쳐놓고 한숨을 쉬었던 그 시계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정혁의 능력으로는 만질 수 없는 금액의 물건이었고 설령 돈이 있었더라도 물건에 연연하는 타입은 아니니 필시 여자에게 선물받은 것일테다. 문정혁은 그랬다. 본인은 손하나 까딱 않는데 여자들이 늘 꼬여서 피곤하다고. 실로 그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으니 그 체념이 재수없기는 해도 비난할 수는 없었다. 허우대만 멀쩡한 놈이야 찾자면 많았으며 허우대가 멀쩡하면서 지갑까지 두둑한 놈도 널렸는데 거기에 적절한 지식과 매너까지 갖춘 남자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문정혁을 막상 놓고 보자면 성격도 상냥하지 못하고 가진 것은 정말 뭣도 없는, 그나마 껍데기만 봐 줄만한 놈이었다. 타고난 머리는 좋은 편이어서 책 한번 안 펼쳐보고 수도권 대학 문턱을 밟긴 했지만 한학기를 채 못 넘기고 등록금이 없다며 미련없이 그만 두었다. 등록금뿐만 아니라 외제차에 집까지 사주겠다는 여자들이 발치에 몸을 던져도 본체만체하고 질펀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아도 따귀 한 번 맞는 법이 없는 정혁은 세계가 온전히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보일 정도였다.

우당탕-

생각에 빠져있던 동완이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씩씩거리며 잔을 내려놓은 선호가 일어선 등 뒤로 넘어간 접이식 의자가 보인다.

“시발, 꺼져.”

허리를 감아오는 정혁의 손을 뿌리친 선호가 포장마차 밖으로 나가려는 걸 잡아서 말렸다. 야, 왜 그래. 오랜만에 만나가지고. 동완이 중간에서 수습하려 들자 선호가 문정혁 저 개새끼, 뱉어내듯 말하고는 얼굴을 찌푸린다. 요는 그랬다. 아무데도 집착없는 문정혁이 못 가져 안달인 단 하나가 이선호였고 그건 처사에 능한 선호에게도 녹록치 않은 문제였다. 

“너보면 엄마 생각나서 그래,” 따위의 유치한 발언을 하면서 엉기는 것도 돌아버릴 판인데 의도가 분명한 손길로 허리를 지분거리는데까지는 인내심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네 엄마 너 낳다가 죽었다며, 기억도 안나는 엄마를 팔고 지랄이야!”

언성이 높아지자 포장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정혁에 비해 덩치는 작아도 힘으로는 지지않는 선호가 기어이 정혁의 볼이 퍼렇게 부어오르도록 한 대 치고 나서야 상황은 종결되었다. 애초에 꼴같잖은 삼류스토리로 늘 시끄러운 시장통의 먹자골목이지만 멀쩡한 사내 셋이 뒤엉켜있는 꼴이야 시선을 충분히 끌고도 남았다. 소주 몇 병과 꼼장어에 대한 값을 치른 동완은 정혁과 선호를 추슬러 포장마차를 나섰다.

“너네 둘 다 언제까지 이럴거야. 차라리 보질 말던가. 이 지랄할 걸 왜 봐. 하아...”

나직하게 지껄인 동완은 한숨을 쉬었다.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면서도 선호가 왜 기어이 셋이 모이는 자리를 거절하지 못하는 것인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았다. 결국 셋이 모이는 건 같은 상처를 안은 사람끼리의 전우애같은 것이었다. 부모 없이 자란 것이 제 잘못인양 짊어지고 살아서인지 햇빛 아래서도 짙게 그늘이 졌다. 동완은 성실해서, 선호는 영악해서, 정혁은 그야말로 잘나서 평범한 척 티 안 나게 지내고 있을 뿐이었다. 제 어두운 구석을 들킬까 조마조마한 가슴을 겨우 내려놓는 건 역시 동류를 만났을 때 뿐인 것이다. 유쾌하지 않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인원의 조합 속에서야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모순적이지만 사실이었다.

“미안.”

정혁의 볼 위로 거뭇하게 변하기 시작한 멍이 씰룩거렸다. 미안한 마음 따위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유아독존인 정혁의 입에서 저런 말이 흘러나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

“알면 됐어.”

웬일로 큰 소동없이 넘어가는 선호가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좋은게 좋은 거지, 생각한 동완이 선호의 등을 토닥거린다. 

“그래, 오랜만에 만났잖아. 철우형네 가게 가서 한잔 더 하고 들어가자.”

같은 원생으로 다섯살 위로 체격이 좋아 학창시절부터 빈번하게 싸움에 연류되더니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결국 그쪽으로 일이 풀린 형이 있는데 얼마 전에 가게 하나를 맡았다며 뻑쩍지근하게 대접할 테니 놀러오라는 말에도 번번이 시간에 쫓겨 찾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떳떳하지 못한 장사였지만 그래도 원생 중에는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선호는 더 이뻐졌다?”

요즘은 깍두기라도 잘나가는 회사원하고 차림이 다를바 없다더니 밝은 회색의 이탈리아제 수트에 캬라멜색 수제화 구두를 갖추어 신은 박철우가 룸으로 들어오면서 대뜸 던진 말이 그랬다. 선호는 애매하게 웃고 마는데 인상이 구겨진 건 정혁이었다.

“형은 양아치짓 여전하네요.”

날이 선 정혁의 말을 하하 웃어넘긴 박철우는 블루레이블 양주의 뚜껑을 열고 제일 먼저 정혁의 잔을 채워준다. 말없이 잔을 비우는 정혁을 보며 그제사 동완은 긴장을 풀고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댔다. 만나기만 하면 팔할은 피곤한 일을 구지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제 자신이었다. 티격태격해도 시시껄렁한 농담으로는 죽이 잘 맞는 정혁과 철우는 한시간 남짓을 떠들었고 동완의 옆에 앉은 선호는 술보다는 화려하게 깎은 과일에 집중했다. 과일이 들리지 않은 선호의 빈손이 무릎 위에서 정처없이 배회하는 걸 보면서 동완은 잡아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건 정혁과 동완의 수많은 차이점들 중 하나였다.

조잡하지 않은 인테리어 어딘가에 카메라가 숨어있는 모양인지 철우가 천정 어느 구석을 보며 손짓을 하자 곧이어 웨이터가 룸으로 들어온다.

“애들 좀 데려와봐. 둘, 셋... 선호도 불러줘?”

장난스런 눈을 한 철우를 빤히 바라보는 선호를 대신해 동완은 형 간만에 봤는데 우리끼리 조용하게 마셔요, 대답한다. 새끼, 성실한 건 여전하네. 코웃음을 치면서도 손짓을 해 웨이터를 내보낸다.

“너네는 그래도 사회에서 번듯하게 살아서 내가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

진심이 묻어나오는 말에 가슴이 뭉클한다. 고아원 재정이 어려운 것을 알고 학비며 생활비며 도와온 사람이었다. 검은돈이니 양아치니 하며 비난할 자격 같은 건 거기 세사람 중 누구에게도 없었다.

“원장님은 아직도 행방불명이라며?”

새 술병을 열며 말을 건내는 철우의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저씨, 대치동이요.”

택시를 잡아 일단은 취해서 걸음만 겨우 가누는 정혁을 밀어넣으려니 선호가 차 밖으로 기우뚱 흘러나오는 정혁의 몸을 받치며 아저씨, 대치동 말고 삼성동으로 가주세요, 하고는 저도 택시에 올라탄다. 

“너 이사했어?”

동완이 조금 섭섭해하며 묻자 선호가 아랫입술을 깨물어가며 조금 망설인다.

“...나, 정혁이랑 같이 살아.”

어안이 벙벙해져 그저 저를 쳐다만 보는 시선에 민망해진 선호가 얼마 안됐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나중에 전화할게, 조심해서 들어가라, 말하고는 아저씨, 가요- 기사를 재촉했다.

택시가 사라진 4차선 도로의 끝을 보면서 허연 입김을 뿜어내며 얼마간을 서있었는지 모르겠다.





“이거 제가 만든 쿠키인데 정혁오빠한테 좀 전해주세요.”

핑크색 쇼핑백을 동완의 손에 쥐어준 여자애가 멀찍하게 떨어져있던 교복 무리에게로 후다닥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동완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못생긴 과자 따위 정혁은 먹을 리도 없었고 제가 누군지는 관심도 없을텐데 고작 이런 것 한봉지 전한 걸로 호들갑을 떨며 들떠서 밤에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잠을 설치겠지.

“너 전해주라더라.”

동완이 건내는 쇼핑백을 받아든 정혁은 내용물을 살피더니 지나가던 일곱살박이 여자애를 불러서 이거 먹어, 하고는 손에 쥐어준다. 아무리 잘 씻겨놔도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인지 어쩔 수 없이 꾀죄죄한데 피부까지 원래 어두운 편이라 마냥 촌애 같았던 정혁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급격하게 변했다. 위험해 보이는 눈빛에 훤칠한 키, 뚜렷한 이목구비는 한번 보면 잊기가 힘들 정도로 잘생긴 외모였고 주변 학교 여학생들이 하교길에 우르르 따라오는 장관이 한동안 계속 되었다. 고아원 안으로 쓱 들어가는 정혁의 등 뒤로는 설마 고아일 리는 없고 봉사활동 하나 봐, 마음씨도 착해, 따위의 가당치도 않은 억측들이 난무했다. 개중에는 사정을 알고도 목을 매는 여자가 여럿이었고 돈을 들고 나타나는 치들도 더러 있었으며 고교시절에는 여대생들까지 대열에 합류해 그야말로 유명세를 치렀다. 학생의 가정환경 파악이라는 목적으로 자행되는 호구조사에서야 질문에 따라 손을 들거나 들지않으면 그만이었지만 문정혁을 보겠다고 고아원 근처에 상주하는 여학생들 무리로 부터 숨기는 어려워 본의아니게 존재가 까발려지게 마련이라 그렇지 않아도 열등감을 부추기는 정혁은 원생들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물론 싸구려 원단의 교복을 입고도 교복 전단지에서 걸어나온 듯한 떼깔을 자랑하는 외모에는 동류로써의 뿌듯함도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시덥잖은 농담이나 헛소리는 잘 지껄이면서도 제 얘기는 별로 없던 정혁이 동완에게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신김치에 꼴에 지단이라고 조촐하게 계란장식이 올라간 국수대접이 올려진 배식판을 들고 동완아, 하고 다정하게 불려진 동완은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날 선호는 장학사의 방문으로 환경미화 게시판 따위를 만드느라 저녁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원생 중에 같은 또래는 일곱이었고 동완, 정혁, 선호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자여서 셋은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고는 했지만 그것은 이선호를 사이에 두었을 때의 일이었다. 동완과 선호는 단짝이었고 정혁과 선호는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에 가까웠다. 정혁과 동완이 부딪히는 일은 대부분 이선호로 기인한 일이었으며 동완은 그것이 유쾌하지 않았다. 사내라면 으레 제 영역을 넘보는 상대에게 적대감을 느끼게 마련이고 그 시기의 남자애들은 더욱 그런 법이라는 것을 치기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특별한 마찰이 없었던 것은 무엇에도 무심했던 정혁의 탓이었을 것이다.

“이선호만 보면 서.”

처음 들었을 때는 급식으로 나온 국수 가락이 코로 나올 뻔 했다. 워낙에 유명했던 터라 여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흔하지는 않아도 간혹 가다 사랑 고백을 해오는 남학생들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별 반응이 없던 정혁이 처음으로 연심을 품은 상대가 하필 이선호라니.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정혁이 선호에게 유별나게 굴었던 것도 같았지만 막 입원했을 때 또래에 비해 덩치도 작고 하얗고 앳된 얼굴의 선호를 귀여워하는 애들은 많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때깔 좋은 옷을 입고 있었고 손을 많이 타며 자랐는지 유난히도 울었던 선호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하얀 반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끌어안고 좁은 이층침대가 빽빽하게 들어찬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거리는 모습은 같은 처지라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정도였다. 정혁과는 다른 의미로 관심의 중심인 것이 바로 이선호였던 것이다. 그래서 티가 안났던 것 뿐이다. 정혁이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흔치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한듯 여겨졌던 것은.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따지자면 오히려 비상한 편인 이선호가 느물거리는 정혁에게 싫은 소리 안하고 지냈던 것 역시 제 특출난 눈치 때문이었을 테다. 실로 덩치도 커서 원생들 사이에서는 대장 격인 정혁의 호의로 선호에게는 여러모로 해가 되는 것이 없었던 것이 사내아이들 간의 주먹다짐으로부터 자유로웠고 또한 여자애들이 갖다 받치는 선물들 중 쓸만한 것은 고스란히 선호의 수중에 떨어졌음에도 여자애들은 정혁에게 속 좁단 소리를 들을까봐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씨발. 조그만 애를 어떡할 수도 없고.”

잔뜩 인상을 쓴 얼굴은 조금 험악한데 젓가락을 꼭 쥔 손가락은 마치 여자 손처럼 고와서 동완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애 한번 사귀어봐. 너 여자를 안 만나봐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시시콜콜하게 제 얘기를 하는 타입이 아니더라도 정혁의 일거수일투족이야 훤히 저절로 꾀게 되고 마는 동완의 해결책은 그랬다. 정혁의 화려한 여성편력은 동완의 권유로 시작된 셈이었던 것이다. 실로 정혁은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고 몰래 담을 넘어 원으로 들어오는 밤이 생겼고 둘의 상담 세션은 그 한번으로 끝을 맺었다. 미묘한 유대감이 생겨나 전보다는 더 살가운 관계가 되었지만 말이다.







_
여긴 신화 글이 없어서 올리긴 하는데 중편 비스무리하게만 넘어가도 후달리는 필력이라 더 쓸 수 있을 지는.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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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9 23:23 Sloppy Fixation
치훈재규








‘...흑체가 적외선을 흡수했다면 가열될 경우 내부의 복사에너지가 다시 빛을 발산하고 그렇다면 흡수된 에너지와 발열 되는 에너지가 동일하다는 빈의 변위 법칙은 성립해야 맞는 것인데 어째서 실험은 가능하고 이론적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거지?[각주:1]'

봄바람이 따뜻해서 강의실에서 드물게 졸기까지 했던 치훈은 봄내음 사이를 헤치고 걸어가며 비몽사몽간에 들었던 양자역학 강의의 내용을 되짚었다. 증명되지 않은 공식이나 현상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당장은 백년이 넘도록 풀리지 않은 이 공식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졌기 때문에 어서 기숙사로 돌아가 증명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싶어져 긴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요.”

누군가 슬쩍 옆에 다가서는 바람에 치훈은 걸음과 함께 생각을 멈추고 조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정수리를 덮은 머리카락 아래로 하얗게 올라온 코끝이 보인다. 손에는 지도가 로딩된 핸드폰이 들려있다. 길을 잃은 모양이다. 가뜩이나 큰 캠퍼스인데 건물들이 다 비슷비슷하다보니 신입생들은 보통 헤매기 마련이었다. 치훈도 일학년 때는 넋을 놓고 걷다가 처음 보는 건물을 마주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그래도 당황스럽지는 않았던 것이 한번 본 지도정도는 좋든 싫든 이미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자신의 말에 빨갛게 달아오르는 귀끝을 보니 아마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가보다, 치훈은 생각한다. 본인에게는 없지만 학습으로 알게 된 감정 중의 하나.

“1학년 기숙사요.”

가뜩이나 길치라서 핸드폰만 믿고 왔는데 뭔가 이상해서요... 하면서 내밀어진 핸드폰에 빨간 화살표가 그려진 곳은 과연 1학년 기숙사동. 나침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길을 잃게 된 모양이었다.

“가는 길인데 같이 가요.”

잠시 잊고 있었던 빈의 변의 법칙이 다시 떠오르자 치훈은 남자에게서 몸을 돌려 걸음을 서둘렀다. 지나치게 큰 캠퍼스는 이런 때에 매우 불편하다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학학, 밭은 숨소리가 들린다. 안내를 맡고 있는 동행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뒤를 돌아보니 이제는 귀끝뿐 아니라 얼굴과 목까지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남자애가 열심히 치훈을 따라 걷다가 멈춰선 치훈을 보고는 살았다, 하는 얼굴로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었다. 보드라워 보이는 하늘색 캐시미어 스웨터 위로 굽은 등의 척추모양이 드러난다.

“키가, 하아, 크니까, 하아, 걸음이, 하아, 빠른가봐요.”

“미안해요.”

말을 하고 보니 별로 미안할 일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그런 말이 나오고 말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면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치훈도, 치훈의 주변사람들도 치훈의 감정결핍에는 익숙해져있어서 새삼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벚나무 많아서 캠퍼스 되게 예쁘다. 사실 공부 잘 하는 애들만 있고 좀 삭막할 줄 알았는데 좋은 것 같아요.”

때마침 부는 바람에 눈처럼 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발을 맞추어 걸어가고 있는데 남자가 말을 꺼낸다. 시선을 맞추며 동의를 구하기에 대충 끄덕여주었다.

“저기, 기숙사.”

초콜릿색 벽돌 건물이 보여서 손을 들어 가리켜주었더니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다지 대단한 건물은 아닌데. 외관도 그렇지만 방음이 제대로 안되는 얇은 벽이라던가 오래 되어서 수압이 약한 화장실 등등 속은 더 부실하기 그지없는데 이 사람이라면 어쩐지 만족하고 잘 지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지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사관 사무실 방향을 짚어주고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하며 꾸벅 인사를 하는 바람에 조금 무안해진 치훈이 결국 입을 열었다.

“동갑일텐데 뭐 그렇게까지...”

치훈의 말에 남자가 동그랗게 뜬 눈을 껌뻑거린다. 어깨 위에 엷은 분홍빛 꽃잎이 몇장인가 올라가있는데 묘하게 어울리는 느낌이 들어 구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럼 같은 일학년?”

“학년은 이학년이지만.”

아, 과학고 출신이구나 석사과정이거나 조교일 줄 알았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혼잣말과 함께 고개도 몇번인가 끄덕거리는 폼이 꽤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귀엽다고 생각해본 건 조숙해서 알 건 다 아는 주제에도 가끔 오빠라고 챙겨주는 여동생들이 다였는데.

사무실로 가려던 남자애가 치훈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으니 걸음을 떼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같이 마주 보고 섰다가 손을 내민다. 난 재규라고 해, 이재규. 앳된 얼굴과는 달리 내밀어진 하얀 손은 의외로 단단한 이십대 청년의 그것이라서 조금 놀랐다.

“최... 최치훈.”

내밀어진 손을 잡고 이름을 내뱉은 치훈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재규는 활짝 웃었다.

“너 꽃잎 묻었다.”

팔을 들어 치훈의 가슴팍에 달라붙어있던 꽃잎을 떼어내 손끝에 올리고 후- 분 재규가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뜬다. 촘촘하게 난 속눈썹이 내려앉은 것을 보는데 어쩐지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소원 빌었어.”

“...무슨 소원?”

“치훈이랑 친한 친구 되게 해주세요.”

장난스럽게 한쪽 눈썹을 올려 찡긋거리는 재규를 보면서 치훈은 처음 느껴보는 알 수 없는 기분을 정의하기 위해 이것저것 감정의 종류들을 떠올려본다.

“너 근데 볼 일 있는 거 아니었어? 되게 빨리 걸었잖아.”

“아...”

잊고 있던 빈의 변위 법칙이 떠올랐지만 어쩐지 재규의 뒷모습이 사무실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치훈은 한참을 그대로 서있었다. 

‘봄이 오면 마음에 흐드러지게 꽃이 핀다.’

시덥잖은 소설이라 생각하며 읽었던 어느 책의 한 구절이 떠올라서 치훈은 왼쪽 가슴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시름시름 상사병을 앓다 죽었는데 납득할 수 없던 그 결말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_
재규재규는 사실 좀 여우._^_
  1. 여기(http://mybox.happycampus.com/ddddark/1887655/?agent_type=naver) 보고 대충 줄여본 것. 말도 안 되는 소리일 확률이 99.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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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2 22:46 Sloppy Fixation
치훈재규







“재규야.”

뒤로 돌아선 익숙한 등을 보자 조금 반가운 마음이 들기에 치훈은 대뜸 이름을 불렀다. 마음먹은 만큼 큰 목소리가 나지 않아 답답해 하고 있는데 재규가 뒤를 돌아보더니 하얀 볼을 붉게 물들이며 치훈에게로 달려와 안긴다. 어찌해야하나 조금 난감해서 엉거주춤하게 벌린 두 팔을 허공에 내젓고 있으니 재규가 야무지게 두팔을 잡아 제 허리에 감아주고는 입을 맞춘다. 순간 온몸이 미끄덩거리는 느낌이 들어 눈을 뜨니 물 대신 글리세린이 가득 담긴 풀에서 푹 젖은 채로 재규와 자신이 손을 잡은 채로 부유하고 있다.





삐비빅-

머리 위로 팔을 뻗어 요란한 기계음을 내는 자명종을 눌러 끈 치훈은 하아,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드디어 했다,
몽정을.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어 감정을 느끼는데는 약간의 장애가 있었지만 그것은 신체적으로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고 오히려 거의 모든 순간에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왔다. 다만 멀쩡하게 변성기를 비롯한 이차성징을 다 겪도록 몽정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 치훈은 조금 걸렸다. 일반적인 자극으로 발기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신체적인 결함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호기심이 들기는 했다. 신체가 발육함으로써 겪게 되는 과정의 일부를 간접경험으로만 접하는 것에 치훈은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감정이 결여되었다고 해서 꿈을 꾸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더러는 황당한 꿈도 있었기 때문에 몽정도 가능할 거라 생각했지만 만일 아스퍼거 증후군으로인해 몽정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거니 하며 포기한 것이 고등학교 2학년의 겨울 방학이었고 이미 창 밖으로는 벗꽃이 한창이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속옷을 물에 행궈 빨래통에 던져넣은 치훈은 샤워기의 뜨거운 물에 몸을 비추다 불현듯 꿈의 한장면을 떠올렸다. 제 입술 위로 부드럽게 포개어지던 붉은 입술. 허리에 감기던 따뜻한 손. 아침의 기운을 빌어 슬슬 고개를 드는 아들내미를 느끼고 손을 가져다 대던 치훈이 멈칫 손을 떨군다. 몽롱한 눈빛을 하고 제게 엉겨붙던 뜨거운 몸이 다름 아닌 이재규였다는 것이 떠오른 것이다.





“안녕.”

식판 위에 노릇노릇 굽힌 토스트와 계란 후라이를 얹은 재규가 우유컵을 입에 물고 있다가 오른손으로 옮겨들며 인사를 한다. 윗입술에 하얗게 우유자국이 묻어있는 것에 손을 뻗으려다 그만두고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묻었어.”

치훈의 말에 한손엔 식판을, 다른손엔 우유를 든 재규는 조금 고민하다 혀를 내밀어 낼름 윗윕술을 훑었다. 바알간 혀가 꼬물락거리는 걸 보자니 어쩐지 아랫도리가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어 치훈은 성급하게 몸을 돌려 배식대로 향했다.

대충 씨리얼이나 먹을 생각이었지만 우유에 말아먹을 생각을 하니 어쩐지 입맛이 동하질 않아 오렌지쥬스와 사과만 집어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최치훈, 하고 부른 재규가 손을 들어 제 옆자리를 가리킨다. 소시오패스 혹은 싸이코패스를 줄여 별명이 패스인 자신이 매사 조용조용한 이재규를 무시하고 방으로 올라가버려도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겠지만 어쩐지 이미 발걸음은 재규의 옆자리로 향한다.

“오늘은 씨리얼 안 먹네?”

딸기쨈을 바른 토스트를 아삭 베어문 재규가 치훈을 본다. 니가 우유를 핥아먹는 걸 보니까 어쩐지 그럴 기분이 사라졌다,는 사설이야 최치훈답게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 묵묵히 사과만 씹었다. 배도 고프지 않으면서 어쩐지 정신없이 먹다보니 심지까지 이빨을 박아넣는 바람에 사과씨도 몇개인가 씹어삼키고 말았다. 발아를 위한 각종 영양소를 비롯 식이섬유까지 씨앗에는 영양분이 많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보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게 되면 유은성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매력을 느끼지는 못 했지만 객관적으로 가장 완벽한 외모였고 교내에서 인기도 가장 많은 여학생이 등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뭐가 유은성이야?”

저도 모르게 생각이 입밖으로 소리가 되어나온 줄은 몰랐던 치훈이 재규가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너도 좋아하는 애가 있긴 있구나... 하는 재규의 목소리에 조금 실망의 빛이 비친 것은 저만의 착각인가, 치훈은 잠시 고민한다. 일반적인 재규의 목소리를 떠올려 볼 때 톤은 낮았고 말의 속도는 느렸다. 아무튼 부정적인 것은 확실한데 비난인지 실망인지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비죽 입을 내민 재규가 먹다만 토스트가 담긴 식판을 들고 일어서더니 먼저 갈게, 하고는 쓰레기통에 음식물을 버리고 위로 올라가버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작은 엉덩이가 계단을 옮길 때마다 움직이는 것이 뭔가 리듬감 있고 보기에 좋아 멍하니 바라보다가 사과를 쥔 손가락을 깨물고서 깜짝 놀라 치훈은 눈을 몇번이나 깜빡거렸다. 생각이 엉킨 아침이 혼란스럽다.

‘이재규는 2학년 때 전학 왔고 짝을 몇번인가 한 적이 있었지. 얼굴은 희고 키는 보통보다 큰 편. 성격은 조용해서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익숙해지면 꽤 수다스러운 면이 있다.’

방에 돌아온 치훈은 책상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특별한 점은 없는데 어째서 몽정의 대상이 된 것인가. 샤프를 손에 꼭 쥐고 꾸벅거리던 옆모습을 보면서 똑바르게 뻗은 코가 부채꼴같다 생각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특기할 사항은 아닌 것 같은데...

반에서 1번부터 떠올리며 재규의 특별한 점을 찾던 치훈은 심각한 표정으로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낸다. 1번은 키가 작다. 그 이상으로는 떠오르는 특기사항은 없다. 그 뒤로 2번부터 15번까지는 주욱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가물가물. 16번이 바로 문제의 이재규. 뒤이은 17번은 성실한 박무열, 그리고 18번부터 27번까지 다시 공백. 28번은 치훈 자신이었으며 맨 끝번인 29번은 정신없지만 머리는 좋은 듯한 강미르.

자신을 제외한 스물여덟명의 같은반 학우 중 인지하고 있는 것은 달랑 셋. 이쯤 되니 제 넓지 못한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등장인물이로구나 납득은 가지만 언제, 왜, 어떻게 이재규를 기억하게 된 것일까. 유명인사인 박무열과 강미르와 차지하고 남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특별한 것이 없는 듯한 이재규. 치훈은 다시 재규를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다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짓더니 기숙사 방문을 잠그고 티슈를 뽑아 침대로 간다.








_
문득 떠올라서 휘갈기고 보니 개그도 이런 개그가 없네. 즈질.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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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2 23:35 Sloppy Fixation
치훈재규





놈을 징계방에 가둔 승리를 자축하는 술파티를 벌이고 눈싸움까지 한바탕 마친 후 재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 방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어 섰다. 최근 몇년 사이 이런 식으로 신나게 순간을 즐겼던 적이 있었던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의 강한 유대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심장 위에 꽁꽁 언 손을 얹고 창 밖을 내다보던 재규는 불현듯 표정을 굳혔다. 중앙 정원의 하얀 눈밭에 작게 솟은 언덕, 그 아래에는 선생님의 시체가 있다.

“하아...”

축축하게 젖은 옷 때문에 덜덜 떨리는 몸을 양팔로 감싸안은 채 중앙 정원으로 걸어나와 선생님의 시체 앞에 선 재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제와서는 누군가가 김진수를 기억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일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기실 모든 일의 원인 제공자는 자신인데 이런 식으로 함께 즐거워해도 되는 걸까. 무릎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은 재규는 며칠 간 제대로 자지 못해 묵직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순간 두 볼 위로 따뜻한 것이 흐른다 생각했더니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뚝뚝 떨어지는 건 눈물 방울이었다. 수신고에 오고는 단 하루도 울고 싶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그래도 눈물은 나지 않았는데.

“이재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손으로 대충 얼굴을 훔치며 고개를 드니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한 치훈이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다. 만 하루를 감금되어있었던 치훈은 조금 마른 듯 했지만 부리부리한 눈은 어둠속에서도 형형하게 빛이 난다. 나를 알지도 못했던 네가 내 이름을 불렀으니 이제 나는 너에게 가서 꽃이 되는 것일까. 달빛을 등지고 선 치훈을 보며 재규는 제 어이없는 생각에 조금 웃고 만다.

“추운데 뭐해.”

발갛게 곱은 재규의 두 손을 그러 모은 치훈이 제 손바닥 사이에 넣는다. 

“최치훈?”

따뜻한 것이 닿은 손등이 간질거려서 재규는 코끝을 찡긋거리며 의뭉스러운 눈으로 치훈을 올려다보았다. 

“옷 젖었는데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릴텐데.”

치훈은 조금 인상을 쓰며 제 두 손 사이에 있는 재규의 손을 잡고 힘을 주어 끌어당긴다. 꽁꽁 언 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아서 엉거주춤 치훈의 손을 잡은 채로 일어난 재규는 조금 비틀거렸다. 

“들어가자.”

치훈의 재촉에도 재규는 움직이지 않는다. 창문 밖의 재규를 보고 어쩐지 급한 마음이 들어 대충 챙겨입고 나오는 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지만 허옇다 못해 보랏빛으로 질려있는 재규를 그냥 두고 들어가면 안될 듯한 기분이 들어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째서 말하지 않았어?”

재규의 물음에 치훈은 그저 작게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다. 재규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이라면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겠지만 정작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다. 다만 겁먹은 초식동물 같은 눈을 하고 자신을 보던 재규를 보자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놈의 손에 이끌려 사지로 내몰리던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살아있어서 정말 기쁜데 한편으로는 너무 두려워.”

발끝을 보고 선 재규는 군데군데 울음이 섞인 문장을 토해내었다. 떨어진 눈물이 재규의 검은 운동화 위에 동그라미를 연이어 그리는 것을 보면서 치훈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한다.

“너야말로 어째서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지 않아?”

“그야, 난 자격이 없으니까.”

끅끅,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도 망설임없는 대답에 치훈은 재규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일정한 템포의 신체접촉은 긴장을 풀어주면서 안정을 준다, 는 책의 구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효과가 있는 것인지 재규의 호흡은 점점 골라지는데 도리어 치훈은 감금 당했던 동안에도 느끼지 못했던 초조함에 혼란스러운 기분이 든다.

“갇혀있는 동안 식사가 보장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에너지를 무리하게 쓰지 않는 게 당연한데도 나는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았어.”

꼭 쥐어진 주먹으로 젖은 얼굴을 부비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재규의 일렁거리는 눈을 보며 치훈은 말을 잇는다.

“만일 아이들이 알게 된다면 너를 사냥할 것 같았어. 그걸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

“어째서 말하고 싶지 않은 걸까.”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가 없는 말에 재규는 잠자코 있었다. 

“들어가자.”

다시 한번 제 손을 잡아끄는 치훈의 손길을 따라 재규는 발걸음을 옮긴다. 

“...고마워.”

치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춥고 외롭고 두려웠던 마음은 맞잡은 두 손 안에서 녹아내렸다.







_
복습을 하던가 해야지. 디테일이나 타임라인이 가물가물하다. 비루한 뇌용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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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재규





"나는 어쩌면 동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해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좋은지도 몰라."

무열의 말에 재규가 눈을 껌뻑거린다. 그러니까 요는 자신이 동정할만하기 때문에 마음에 든다는 것일까. 아무리 노력해서도 이길 수 없는 최치훈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으니 말이다. 박무열이 적이 되는 것은 달갑지 않으니 열등한 걸 기뻐해야하는 건가. 베개에 턱을 대고 엎드린 채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는 재규의 머리를 한 손으로 헝클어드린 무열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대충 속옷만 챙겨 입은 채로 의자에 걸어둔 바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입에 물고 창문을 열어 젖힌다. 불과 삼년 사이에 무열은 굉장히 변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일등 신랑감인 일류 대학생이지만 적어도 재규의 앞에서만은 여지없이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뒤틀린 욕구, 내재된 욕망, 그리고 놈으로 인해 각성한 본성까지도.

"그럼 은성이는? 전혀 동정할만한 이유가 없잖아. 예쁘고 똑똑하고 밝고."

"그래서 언제든 더 깨어지기 쉬워보였어. 아직 망가지지 않았으니까."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무열의 단단한 등을 보면서 김진수의 그늘에 숨어 모두의 탓으로 돌린 자신보다는 원망할 것이라고는 본인 뿐이었던 무열이 더 안쓰럽다고 생각했지만 재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사실은 치훈이를 버리려고 했었어.”

무열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재규는 금방 알아차렸다. 사건 이후로 종종 대화를 나누게 된 치훈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치훈은 그 때 다리가 부러진 자신을 위해 돌아온 무열을 보면서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인한 자신의 결핍을 처음으로 실감했다고 했다. 눈밭에서 다른 곳도 아닌 다리 부상자를 데리고 돌아가는 무모한 짓은 하지않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치훈은 포기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설사 설원에서 동사를 하게 되었더라도 치훈은 무열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편지에 어떤 식으로도 동요하지 않았던 치훈과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이유는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규가 발신인임을 알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치훈이라면 내면의 괴물을 깨우게 만들었더라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네가 그랬더라도 아무도 너를 원망하지는 못 했겠지만 아무튼 너는 그러지 않았잖아.”

재규의 말에 무열이 피식 웃는다. 재규는 그 모습이 조금 섬뜩하면서도 가엽다고 느꼈다. 감히 존재감조차 없던 자신이 박무열을 위로하는 날이 올 줄이야. 상위 0.1%가 모인 곳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박무열이 고작 그곳에 적응하지 못한 채 죽은 듯 살아가던 자신에게 금이 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열은 꿈에서라도 재규에게 기대거나 손을 내미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재규는 현실감이 없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알에서 부화한 괴물을 숨긴다고 해서 내가 괴물이 아닌 건 아니잖아.”

재규는 무열의 돌아선 등이 안쓰러워서 창가에 선 그의 등을 두 팔 벌려 안았다. 그리고 그때 치훈을 얇은 로프로 끌어올리느라 찢어진 상처가 흉측하게 남은 무열의 손바닥을 펴고 제 손으로 감쌌다. 무열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가 달짝지근하다. 박무열은 아마도 자신을 미워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미워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놈의 말대로 모두가 잠든 괴물이라면 나쁜 건 나야, 박무열. 내가 네 괴물을 깨우는 계기를 제공했으니까. 그러니까 날 원망해. 원망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마음은 편해지잖아.”

늘 비관하게 만들었던 재규의 어중간한 성적은 수신고 밖에서는 여전히 상위 0.1% 미만이었기 때문에 원하던 대학에 무난하게 합격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수신고 출신인 재규와 함께 스터디를 하거나 함께 조별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상대적인 것.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선은 자신을 그토록 괴롭게 했었다. 만나본 적도 없는 김진수가 자신의 분신인것처럼 느껴질 만큼. 그리고 그의 분신이 되는 순간, 나약한 자신을 원망하는 대신 주변에게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면서 용기가 났었다. 검은 편지를 발송하게 만들었던 무모한 용기가. 그리고 자신의 편지를 받고 두려움에 떨던 아이들의 모습은 희열을 느끼게 했다. 그 순간 자신의 안에 잠들어있던 괴물은 이미 깨어났는지도 모른다, 놈을 만나기 전에 이미.

“가끔 그 때 모두 죽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재규의 말에 무열이 몸을 돌려 바닥을 향한 얼굴을 들어올려 시선을 마주한다.

“무슨 소리야?!”

금새 수신고의 박무열로 돌아온 올곧은 남자가 재규의 두 어깨를 강하게 쥔다. 데생같은 섬세한 얼굴에 따뜻한 온기가 번지는 것을 보며 재규는 눈을 감았다. 

“그랬다면 너는 더이상 괴롭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나는 너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지금이 더 좋지만.”

무열은 재규를 잡았던 손을 놓고 대신 터뜨릴 듯 강하게 마른 몸을 안고 입을 맞췄다. 

“이재규, 나는 널 원망할 수가 없어. …불쌍하니까.”

더이상 열등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지만 계속 이렇게 나약한 척, 위태로운 척 연기할 수 있다고 재규는 생각한다. 그래서 무열이 자신은 이재규의 기사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든지. 괴물은,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났다.







 _
다크재규를 원했지만.ㄲㄲㄲ
교정은 나중에.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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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8 23:46 Sloppy Fixation
치훈재규






"이재규, 계란말이 마지막인데 내가 먹어도 돼?"

놈은 죽었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놈이 죽은 후 꼭 일년이 되는 오늘, 과연 우리가 놈의 바람대로 괴물이 되었는가, 하면 확실한 답은 할 수 없다. 놈이 추락하던 그 순간, 적어도 그 때만큼은 괴물에 가깝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리고, 또 변한 것 하나.

"먹는다."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치훈이 깔끔한 젓가락질로 재규의 도시락통에서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올린다. 음음... 맛을 음미하는 소리를 내며 우물거리는 치훈만큼은 그 이후로 무언가 변한 것이 확실하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지고 있어 일반적인 사람과 다른 사고 회로를 가진 치훈은 놈을 만나기 전에는 재규를 인지하지도 못 했다. 물론 재규도 로봇과 같은 치훈이 계란말이를 좋아하는 '귀여운' 식성을 가지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지만. 자신의 존재 여부를 인식하지 못했던 치훈과 멋대로 치훈의 성격에 대해 정의를 내린 자신. 둘 중에 구지 나쁜 쪽을 꼽자면 누구일까. 

“맛있어?”

재규의 물음에 치훈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응, 하고 대답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행을 가자고 한 거야?”

일반적으로 치훈의 언행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뭐 최치훈이니까, 하며 납득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놈이 죽은 지 꼭 일년, 그리고 윤수의 기일이기도 한 오늘 치훈은 우리 여섯명에게 자신의 집이 있는 대구의 과수원으로 3박 4일 간의 여행을 제안했다. 하지만 은성이는 사건이 종결된 후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수시가 일찌감치 결정된 무열이는 방학이 되자 은성이를 보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미르는 대학에 가면 놀 수 없다는 답잖은 이유를 내세우며 홀로 배낭여행을 떠났으며 영재는 길거리에서 모델로 캐스팅 되어 일반고로 전학하며 아예 집을 나왔는데 일이 잘 되는 모양인지 스케줄 때문에 올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믿었던 강모마저도 은성이도 없는데 사진 찍을 것이 없지 않냐며 오지 않겠다고 했다. 주모자인 주제에 혼자 가도 별로 상관없어, 라는 태도로 일관하던 치훈을 보다 못해 친척들과의 해외여행에서 빠져가며 치훈의 계획에 동참한 건 결국 재규 하나였다.

“너만 올 줄 알았어.”

언제나와 같이 억양없이 밋밋한 치훈의 말투에 재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뭐?! 하고 묻는다.

“유은성 미국 갔으니까 박무열 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양강모는 유은성 때문에 오기 싫다고 거절 했었지. 강미르나 조영재는 너처럼 자기일 취소해가면서 올 타입들은 아니잖아.”

“나랑 둘이서 가면 뭐가 재미있다고...”

작게 중얼거리는 재규의 목소리에 치훈이 피식 웃는다. 최치훈이 웃는 걸 보게 되다니. 재규는 친척들 앞에서 일류대학에 합격한 아들로 유세해보려 했던 어머니를 힘겹게 설득해서 가족 여행에서 빠진 보람은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다.

“도시락 싸올 줄은 몰랐는데.”

“너 계란말이 좋아하잖아.”

주말에는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게 되어있는 수신고에서 재규는 종종 간단한 것을 만들어 먹었다. 빵조각을 물고 있다 보니 밥생각이 나서 조금 늦은 시간에 계란말이에 김치찌개를 끓여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치훈도 배가 고파졌던지 식당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사건이 있고 나서 석달쯤 후였는데 윤수 아버지의 도움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고 조용히 마무리 되어서 내면에서 괴물의 알이 깨어난 건지 어쩐지는 알 수 없어도 학교 생활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재규는 다시 존재감 없이 머릿수를 채우고 있는 전학생으로, 치훈은 감정결핍의 천재로. 함께 8일간을 겪었던 아이들과는 지나가다 부딪히면 눈인사를 하거나 종종 안부를 묻기는 했지만 입시로 바빠졌고 구지 유쾌하지 않은 그때의 이야기로 유대감을 조성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개만 먹어도 돼?’

최치훈의 입에서 한개만, 이라니. 책을 보며 식사를 하던 재규는 너무 깜짝 놀라서 사레가 들렸었다. 그때 치훈이 말하길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계란말이라고 했다. 전기 충격기 같은 복잡한 기계는 잘 만들면서 계란말이는 귀찮아서 도통 만들 수가 없다고 말하는 치훈을 보며 보통사람들과 다르긴 하지만 조금 인간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일 함께 겪었던 그 악몽 같았던 8일간이 없었더라면 치훈은 자신에게 계란말이를 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근데 우리 둘이 가서 뭐하지.”

“재미있게 해줄게.”

핸드폰으로 근처에 뭐 할만한게 있나 검색하던 재규는 기대하지 못한 말에 너무 놀라서 도리어 푸흡, 소리를 내어서 웃고 말았다. 

“못 믿겠으면 할 수 없고.”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으쓱한 치훈은 묵묵히 재규가 싸온 도시락에 집중한다. 낮은 기차의 간의 테이블에 맞추어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앉은 치훈을 보자 문득 과학실에서 전기 충격기를 만들며 '편지 네가 썼지?' 하고 묻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것은 물음보다는 증명을 위한 수순에 가까웠고 치훈은 결국 놈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자신이 편지의 발신인임을 말하지 않았었다. 과연 치훈이 아닌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혹은 자신이 치훈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남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이 살 수 있음에도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치훈의 결핍이라는 건 어쩌면 누구보다 그를 도덕적이고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믿어.”

한글자 한글자 힘주어서 말했다. 모두가 괴물이 되어도 너만은 그대로 일 것이라는 걸. 설사 네가 괴물이 되어도 그건 올바른 선택일 것이라는 걸. 믿어.

치훈이 환하게 웃는다. 믿기 힘든 장면을 보면서 재규도 웃었다. 흔들리는 기차 안. 마음 속에서 깨어나는 괴물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소년들은 평화롭다.






_

드라마를 오랜만에 봐서인지 학원물이라서인지 아무튼 동했다. 재규는 너무 재규재규해. 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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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3 00:18 Sloppy Fixation

두광





열심히 수학문제를 풀고 있는 등 뒤로 우당탕 큰 소리가 나고 애들이 술렁거렸지만 기광은 미동도 없이 문제에 집중했다. 하지만 교탁을 탕탕 두드려 애들에게 주의를 준 학주가, 윤두준 괜찮아? 하는 목소리에는 열심히 움직이던 샤프가 우뚝 멈춰섰다. 기광이 뒤를 돌아보자 짙은 눈썹 사이의 미간을 잔뜩 찌푸린 두준이 교실바닥에서 배를 안은 채 웅크리고 있다.


" 다들 조용히 안해?"

기분이 좋은 날이나 나쁜 날이나 아무튼 성격이 개같아 별명만은 귀엽게도 강아지인 학주의 말이라 애들은 다시 등을 돌리고 기광도 다시 시험지로 눈을 돌렸다. 안 그래도 수학에 약한데 두준이 신경 쓰여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검산해야 하는데......'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곗바늘 소리가 귓가에서 스테레오로 들려오자 초조해진 기광이 샤프 꼭지를 잘근잘근 씹으며 흩어진 정신을 모으려고 애쓰는 동안 구급차가 도착했다. 두준이 실려나가고도 집중이 되지않아 결국 제대로 검산을 하지 못한채 시험지를 제출한 기광이 풀이 죽어 자리로 돌아와 핸드폰을 켜기 무섭게 드르륵 문자가 온다.

[오오 간호사누나 예뻐]

자신은 걱정이 되어서 검산도 제대로 못했는데 구급차까지 타고 실려나간 녀석의 문자가 고작 이런 것이라니. 기광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문자보낼 정신이 있는 걸 보니 큰일은 아닌가, 라고 생각하자 조금 안심이 되어 포옥 한숨이 나왔다.

 

 

윤두준은 맹장이었고 기광은 전교석차 4등이 떨어졌다. 여름에 상위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자율학습과 더불어 특강학원을 다니기로 한건 기광의 자의였다. 어차피 집에 있어봐야 할일도 없고 다른애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편이 안심이 된다. 두준은 그런 기광을 소심하다고 놀리지만 기광은 하교할 때 기다려주지 않거나 체육복을 먼저 갈아입었다고 삐지는 두준이 훨씬 소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두준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야, 윤두준은 소심하니까.

자율학습이 끝나고 학원 갈 시간까지 혼자 교실에 남아 자습을 하다 창문밖이 시끄러워 내다보니 두준이 애들 몇명과 농구를 하고 있고 여자애들은 삼삼오오 모여 구경하는 중.

하긴, 농구하는 윤두준이 좀 멋있긴 하지.

기광은 어릴 때부터 두준과 같이 다니면 조금 우쭐한 기분이 되곤 했다. 두준이는 남자가 봐도 잘 생겼고 키도 크고 붙임성도 좋고... 두준의 장점을 머릿속으로 나열하던 기광은 두준이 드리블을 하며 석현이와 태호를 제끼고 슛을 넣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우와아,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순간, 애들에 둘러싸여 승리의 브이를 마구 날리던 두준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손을 흔들어보았는데 두준이 금새 고개를 돌리고 게임이 다시 시작된다.

하긴 소머즈도 아니고 운동장에서 2층에 있는 교실이 보일리가. 기분 탓이겠지.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피운 것이 뻘쭘해진 기광이 주위를 쓰윽 살피고는 털썩 자리에 앉아 문제집을 풀기 시작한다.

 

 

" 이기광, 일어나."

목에 닿은 차가운 느낌에 눈을 번쩍 뜨니 땀인지 물인지 아무튼 흠뻑 젖어있는 두준이 이온음료를 내민다. 따뜻한 햇살에 정신이 점점 몽롱해진다 했더니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기광은 아직 잠기운이 달아나지 않아 감기는 눈을 뜨려고 애쓰다 이마에 두준이 음료수 캔을 대어주자 앗 차거, 하면서 두준의 가슴팍을 휙 밀쳐낸다.

"방학인데 왜 학교에서 자고 있어."

넘어질뻔 했는데도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기광의 옆에 와서 선 두준이 기광의 가지런한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묻는다.

"그냥 보강."

" 전교 일등도 보강을 하냐?"

두준이 한쪽 눈썹을 잔뜩 올리고 기광을 본다.

"5등이야."

기광은 대답 뒤에 너 때문이잖아, 하고 붙이려다 그만 두었다. 집중 못하고 시험을 망친건 자신의 잘못이다. 게다가 맹장이 터진 것은 두준의 의지와는 상관도 없는 일인데.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넌 왜 방학에 학교까지 와서 농구를 해, 하고 말을 돌려보았다.

"나 재시험. 오늘은 국어랑 물리랑 음 세계사? 또 뭐봤더라. 암튼 내일이랑 모레 또 봐야 돼."

"근데 농구하고 있냐."

오늘 본 시험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쯧쯧, 하고 혀를 찬 기광이 한심한 눈으로 두준을 쳐다보았지만 두준은 태평한 목소리로 이제와서 책 본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하며 푹 젖은 티셔츠를 선풍기 바람에 대고 펄럭거린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좀처럼 자기 의사를 밝히는 법이 없는 기광의 단호한 말투에 깜짝 놀란 두준이 선풍기에서 시선을 들려 기광을 쳐다본다. 기광은 조금 민망해져서 뭐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며 얼버무렸다.

"너같은 전교일등이야 당연히 서울대로 갈텐데 뭐가 걱정이야."

어깨에 손을 척 올리는 두준을 보며 나말고 너말이야, 너. 하고 가까이 다가온 두준의 이마를 검지손가락으로 쓰윽 밀어낸다.

"아줌마가 얼마나 걱정이신지 알아? 있다가 내 요점정리 노트랑 시험지 갖다줄게, 그거라도 봐. 나 학원간다."

가방을 척척 챙겨서 자리를 일어나는 기광의 등 뒤로 따라온 두준이 헤드락을 걸어 턱으로 기광의 정수리를 누른 채로 기광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등 뒤로 달라붙는 두준의 땀에 젖은 셔츠는 퍽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기광은 별 말 없이 두준을 반쯤 업은 채로 교실을 나섰다.

 

 


"아줌마, 두준이는요?"

"글쎄 씻나보다. 위에 올라가봐."

네, 하고 공손하게 대답한 기광은 가지런히 운동화를 벗어놓고 두준의 방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간다. 기광의 집과 겨우 한블럭 거리인 두준의 집에는 워낙 어릴 때부터 드나들어서 제집처럼 익숙하다. 주로 두준의 집에서는 몰래 술을 먹거나 빨간 비디오를 보거나 하는 나쁜 일을 많이 해서 아주머니를 뵐 때마다 조금 죄송한 기분이 되기는 하지만.

브리프만 입은 채로 침대에 엎드려 만화책을 뒤적거리던 두준이 계단으로 올라오는 기광을 발견하고는 왔어? 하며 몸을 일으킨다.

"어머니도 계신데 옷 좀 입어."

훌렁 벗은 윗몸에 기광이 쿠션을 던지자 두준은 아, 뭐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 어때 하며 궁시렁 거리면서도 엎드렸던 몸을 뒤집는다.

어우 이 야만인, 하며 한소리 하던 기광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이제 보니 두준의 배에 길게 상처가 있다. 송충이 같은 실밥도. 기광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두준의 상처를 본다.

"왜 그렇게 봐. 오빠가 좀 몸이 되긴 하지만."

실실 웃던 두준이 심각한 기광의 표정을 보고는 뭔가 하는 눈으로 기광의 눈길이 닿은 곳을 본다.

"아, 이거 맹장?"

두준이 제 상처를 쓱 내려다보고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한다.

"아프겠다."

"이게 언제적인데 아직도 아프냐."

무심한 손으로 상처를 쓱 만진 두준이 걱정스러운 눈을 한 기광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만져봐도 돼?"

"어."

보고만 있어도 손발에 힘이 빠진다. 엄마가 의대에 가길 원하는 걸 알고 있지만 이래서야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기광은 생각한다. 정신과나 치과라면 괜찮을까. 으으, 그래도 이런거 다 공부해야겠지. 기광은 실밥 위를 더듬으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진짜로 아프진 않은데..."

기광이 생각에 빠진 동안 두준은 배꼽 근처에 기광의 가는 숨이 닿았다 떨어졌다 해서 간지러움을 참느라 온 정신을 집중하는 중이었다. 상처에 닿아있는 기광의 손가락 움직임에 온 신경이 모여있다. 배가 간질간질한 것도 같고 화끈거리는 것도 같고...

"나 샤워 좀."

급하게 생각난 듯 두준이 제 상처에 닿은 기광의 손을 떼어내고는 화장실로 휙 사라진다.

막 비누냄새가 좋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안 씻은 거였나?

두준이 화장실로 사라지는 것을 본 기광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벽장을 가득 메운 책장에서 만화책을 꺼내어 침대에 출렁 다이빙을 한다.

 

 

"노트 주러왔다며, 아직 안갔어?"

맨몸에 타올만 걸친 두준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저런 이기적인 자식. 받아먹을 것만 홀랑 먹고 입닦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간다고 가면 되잖아, 하면서 기광은 두준의 집을 나섰다.

두준이 기광을 학교에서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날부터였다.

야 윤두준, 하고 부르자 두준은 움찔하고 서더니 이내 못들은척 하고 가던 길을 간다. 요섭이 왜 너네들 싸웠어 하고 묻자 두준이 그런거 아니야, 하고 요섭의 팔을 걷어낸다. 확실히 싸운 적은 없지만 요즘 두준은 좀처럼 기광 근처에서 보기 힘들었고 등하교를 같이 한지도 오래 되었다. 당번이라 일찍 가서 늦게 올때도 꼭 기다려주던 두준이었으므로 기광은 제가 뭘 잘못했나, 그 사이 몇번이나 고민했지만 딱히 집히는 것이 없었다.

"백일주 마시자. 오늘 우리집 비어."

요섭의 목소리에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기광이 얼굴을 들었다.

"윤두준도 가?"

"그럼. 술귀신이 빠질 자리가 아니지."

 

 

"너네 요즘 왜 그래?"

"뭐가?"

기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요섭이 눈짓으로 제 방문을 가리키며 너랑 윤두준 말이야, 그런다.

"계집애들처럼 화장실도 같이 가던 자식들이 오늘도 멀찍히 앉아가지고는. "

나도 몰라, 한숨을 포옥 쉰 기광이 요섭이 가리켰던 방문을 빤히 쳐다본다. 우르르 요섭의 집에 같은반 애들 예닐곱명이 몰려가서 대낮부터 술을 푸기 시작했는데 정작 술귀신이라고 불린 두준은 소주 두잔에 애저녁부터 뻗어 요섭의 방에 옮겨다놨다. 기광은 알딸딸한 맛에 슬슬 적응하고 있었다. 제사 때 한두잔 얻어마시거나 두준의 집에서 몰래 과일주 같은 건 조금씩 훔쳐먹어봤지만 본격적으로 마셔본 건 처음인데 애들이 하나둘 뻗어나가는 걸 보니 자신이 의외로 술이 센 편이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으으 백일 남았다."

요섭이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을 한다. 평소에 공부도 안하면서 생색은, 하고 기광이 면박을 주자 요섭이 재수없어 범생이, 하며 지지 않고 반박 한다.

"화장실 어디야?"

요섭과 둘이 살아남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드디어 조금 취해 발그레해진 볼을 한 기광이 비틀하며 일어선다.

잔뜩 취한 요섭은 아무렇게나 손가락을 뻗었고 그 손끝을 따라 기광은 어그적어그적 겨우 걸어간다. 문을 열었더니 화장실 대신 윤두준이 침대에 무방비하게 누워있다. 어릴 땐 같이 다니면 다들 기광이 두준의 동생인 줄 알았다. 키차이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났고 덤범거리면서도 늘 기광을 챙겨주곤 했으니까.

진짜 형처럼 든든했는데...

요즘은 내도록 이 잘생긴 얼굴이 잔뜩 구겨진 것만 봤더니 새삼 새로워 기광은 손을 뻗어서 만져보았다. 잘생긴 눈썹. 멋진 코. 은근히 예쁜 입술.

간지러웠는지 끙, 소리를 낸 두준이 뒤척이자 깜짝 놀란 기광이 무릎꿇고 앉은 자세 그대로 침대에 고갤 박았다. 자는척 해야지, 생각하며 술냄새가 섞인 더운 숨을 가다듬으려 애써보면서.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쓱쓱 문지른 두준이 누운채로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동그란 뒤통수가 코앞에 있다.

"이기광, 왜 이러고 불편하게 자고 있어."

살며시 어깨를 흔들어보았지만 기광은 깨어날 기색이 없다. 몸을 일으킨 두준은 침대에서 내려와 기광을 어렵게 안아들었다.

"어우, 쪼그만게 뭐 이렇게 무거워."

두준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기광은 자는척하는게 들킬까 눈을 꼭감고 팔다리에 힘을 뺐다.

 

 

지금쯤이면 갔을까, 하고 슬쩍 눈을 떴다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두준과 눈이 마주친 기광이 깜짝 놀란다.

"뭘 그렇게 놀라."

"어? 어... 그..."

당황해서 집에 가야지 엄마 걱정하겠다, 핑계를 대며 침대에서 어기적어기적 기어나오던 기광이 이불에 발이 엉켜 쿵 떨어진다. 두준이 괜찮아? 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본다. 오랜만에 보는 상냥한 얼굴. 얼른 일어나서 괜찮다는 걸 보여줘야하는데 하필 무릎으로 떨어져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아오, 가오 안서게 하필 윤두준 앞에서...

창피해서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무릎을 만지는 기광 앞쪽으로 두준이 쪼그리고 앉아 등을 내민다.

"업혀."

"엉?"

"집에 가야된다며."

"어... 그렇긴 한데..."

사실 집에는 오늘 두준이네서 잔다고 말해두고 나왔지만 뒤를 돌아앉은 두준의 넓은 등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하고 업히려다가 기광은 불현듯 아까 두준이 무겁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저, 나 무거운데."

"나 힘쎄. 너 업어서 키운 거 모르냐, 이 형님이."

씩 웃는 모습은 기광이 어릴때 보아왔던 그 윤두준 그대로라서 업혀보았다. 윤두준의 등에 매달려 술병에 치킨 뼈다귀들이 뒹굴거리고 있는 거실로 나오니 애들은 벌써 다 죽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네시. 어디로 가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기광은 두준의 등에 업힌채로 차가운 초가을의 밤공기를 맞았다. 다리는 이제 괜찮은데도 두준은 기광을 내려주지 않았다. 짧은머리칼 사이사이로 반짝, 땀방울들이 비친다.

결국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편의점에 잠시 멈춰서야 두준의 등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무릎은 여전히 얼얼하지만 애초에 겨우 이런걸로 걸을 수 없을리가 없었다. 멍청한 윤두준. 멍은 보기 싫게 들겠지만 어차피 반바지 입을 일도 없는 날씨. 덕분에 지난 몇달간의 냉전이 휴지기에 들어갔으니 넘어져볼만 하다고 기광은 생각한다.

편의점 밖에 내어진 테이블에 앉아있었더니 물과 숙취제거제 한병을 눈 앞에 내민 두준이 담배를 꺼내 문다. 별로 담배 같은 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가끔씩 두준은 비행청소년 코스프레를 한다.

"내가,"

담배를 문 채로 웅얼거리며 내뱉은 소리에 기광이 응? 하고 대답한다.

"너랑 같은 대학은 못가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정도는 갈 수 있을 거야. 그치? 응? 그럴거야."

두준이 자신의 말에 묻고 대답하고 맞장구까지 치는 걸 보던 기광이 픽 웃는다.

"뭐야 소주 두잔 먹고 취해서 자문자답의 시간이냐."

크크크, 웃어주었더니 두준의 표정이 지나치게 시무룩해져서 기광은 얼른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되지, 하고 덧붙인다.

"왜 고등학교는 3년 밖에 안되지?"

기광은 3년도 지긋지긋해서 동의할 수 없었지만 웬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잠자코 있어주었다.

 

 

두준은 백일주를 마신 이후 살짝 돌았는지 문제집을 학교에 가지고 와서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광에게 부쩍 말을 많이 걸었는데 대부분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기 위해서 였다.

"야, 이게 뭐 어쩌라는거야?"

슬쩍 보니 수학문제.

"일단 엑스를 구해야지. 이거 이렇게 이차방정식으로. 그 다음에..."

"이차방정식?"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하는 눈으로 보아주었더니 정말 모르는 표정이다. 허....

"윤두준아. 이건 중1때 나오는 거 잖아."

"그렇게 옛날에 배운걸 어떻게 기억해."

억울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할말이 없다.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열공 모드가 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현상이긴 한데 앞이 영 깜깜해서 기광이 어휴, 하고 한숨을 쉰다.

"그러게 갑자기 왜 안 하던 공부를 하겠다고 이래. 진작 좀 하지."

"나는 너랑 같은 학교를 못다니잖아. 그래서 그 근처라도 가야겠어."

두준이 커다란 손에 펜을 꼭 쥔 채로 눈에 힘을 주고 말하는데에는 기광도 조금 감동했다. 하긴 유치원부터 주욱 같이 다녔는데 기광도 조금은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래도 대학을 같이 갈 수 있다는 것 같은 희망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쉬운 마음 따로 당연한 마음 따로다.

"니가 없는 건 잘 모르겠어. 별로인거 같애. 아무래도 공부하기가 너무 싫어서 일부러 너랑 안 놀아보려고 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난 너랑 있는게 좋은 것 같아서."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기광이 웃으며 그러자 두준이 심각한 얼굴로 아무래도 그런가봐, 그런다.

"미쳤냐?!"

기광이 몸서리를 치자 두준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는 입을 겨우 연다.

"너 막 꿈에도 나와."

"꿈에서 내가 뭐하는데?"

무심한 기광의 질문에 두준은 아, 몰라 나도, 하고 얼버무리더니 이거 얼른 풀어달라니까! 소리를 지르며 문제집을 톡톡 펜으로 두드린다.

 

 

언제나와 같은 하교길이지만 고등학교 3학년으로는 마지막 하교길을 두준과 기광은 나란히 걸었다. 쌀쌀한 바람사이로 둘은 여느 때보다는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며 걸었다. 기광이 안녕, 하고 손을 흔들고는 먼저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두준이 인사 대신 손목을 턱 잡는다. 키는 두준보다 한뼘만큼 작지만 힘으로는 밀리지 않는데 기광은 좀처럼 두준에게 잡힌 손목을 빼낼 수가 없다.

"야, 왜이래."

기광이 쩔쩔매며 두준을 올려다보자 두준의 하얀 숨이 이마에 와닿는다. 가뜩이나 부리부리한 눈매인데 부릅뜨고 있는 두준의 눈을 보니 기광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든다. 사실 싸움도 못하고 깡도 없는 녀석인데 저 눈빛에 학기초 애들은 다 윤두준이 쌈짱인 줄 알았다. 뭐 입 열자마자 금새 나사풀린 병신인게 들통났지만 아무튼 근거리에서 보면 역시 움찔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윤두준."

제차 이름을 불러도 꿈쩍도 하지 않던 두준이 어후, 이기광 너, 진짜... 같은 문장이 되지 않는 단어들을 나열하다가 뭔가 마음처럼 되지 않는듯 기광의 손목을 풀어준다. 피가 통하지 않아 두준의 손가락 모양이 허옇게 기광의 손목에 남아있다.

"너 요즘 왜 그러냐?"

기광이 손목을 돌려 풀면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두준을 보자 두준이 미안, 하고는 후다닥 달려서 제집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기광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다.

쌀쌀한 초겨울에 잠깐 달아올랐던 소년들이 서있던 골목의 공기도 이내 차가와졌다.

 

 


_반년쯤 전에 한창 비스트에게 버닝 시작했을 때 대충 끄적거리던 건데 교정 보기도 귀찮고 더 써지지도 않을 것 같아서. 요즘의 윤두준 연예인간지 보다 보면 훈고딩 선배 포스 폴폴 날리던 데뷔 초가 그립다. 지금은 준요에 제일 끌리고 있지만 비주얼 리더는 역시 두광.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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