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08 00:09
Waiting Room
현유
"종현아, 들었제. 진기 내려왔다. 이쁜 서울색시랑."
종현은 뭐가 좋다고 싱글벙글인 엄마의 말을 들으며 밥상은 본척만척 애꿎은 장판에 손톱자국만 만들고 있었다. 그 자식 잘난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왜 그래, 하고 불퉁하게 말해보았지만 엄마는 계속 진기의 얘기 뿐이었다.
"진기 고거, 사내자식이 곱게 생겨서 샌님처럼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어떻게 서울처녀를 다 꼬셔왔대."
엄마가 제 일처럼 기뻐하는 것에 어쩐지 배알이 꼴려 종현은 결국 숟가락을 놓고 집을 나왔다. 이진기에게 비교 당해온 것이야 옹알이 하던 시절부터 주욱 되어 익숙한 일임에도 이번만큼은 듣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진기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유명했다. 말간 얼굴을 해서는 조근조근 말을 하는 폼을 여자애들, 선생님, 동네 아줌마 아저씨 할 것 없이 다들 좋아했다. 게다가 한 학년에 한 반 뿐인 작은 학교였지만 단 한번도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고 시골구석에서 보란듯이 서울로 대학을 간 유일한 사람이니까. 남자애들이야 당연히 퍽 못마땅해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잘난 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소란스럽지 않은 진기를 마뜩찮아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종현이형, 진기형 서울에서 데려온 누나 봤어?!"
집을 나오며 담뱃갑을 뒤졌더니 마침 돛대라 담배나 사야겠다 싶어 슈퍼에 들렀더니 아저씨 대신 가게를 지키고 있던 기범이 종현을 보고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한다. 종현이 담배를 꺼내어 물며 작게 고개를 젓자 기범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아까 여기 같이 맥주 산다고 왔었거든? 진짜 예뻐. 연예인 닮은 거 같기도 하고, 하며 조잘조잘 떠든다. 작은 동네라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어딜가도 진기 이야기 뿐이다. 종현은 기범에게 대꾸를 하는둥 마는둥 거스름돈을 챙겨 가게를 나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진기네 집 쪽으로 슬리퍼를 직직 끌며 걸어간다. 이진기 이야기는 듣기 싫지만 그래도 이진기는 역시 좀 보고 싶었다. 낮게 둘러진 진기네 집 담장 너머로 슬쩍 보니 하늘하늘한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가 높은 구두를 신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과일을 씻고 있다.
쟤구나, 이쁜서울색시.
멀리서 진기가 데려왔다는 소문의 여자를 훔쳐보던 종현은 차가운 물에 꽁꽁 언 손을 호호 부는 여자애를 보며 얼굴이 뽀얀 걸 보니 서울애는 역시 다른가 생각하다가 얼굴 흰 걸로는 뒤지지 않는 이진기가 생각나서 설풋 웃음이 나온다.
"어머니, 이거 종현이가 부탁해서 사온 거예요. 어머니 요즘 무릎 안 좋으시다고 종현이가 걱정 많이 했어요."
뭐 이런 걸 다 사왔냐며 사양하는 종현이 어머니의 양손을 꼭 붙잡아 영양제가 든 쇼핑백을 들려드린 진기가 집안을 들여다 보고 어머니, 종현이는 어디 갔어요? 하고 묻는다.
"그자식 어디서 뭐하고 다니는지 아는 사람은 이세상에 너 하나 아니냐. 친구가 멀리서 왔는데 또 어딜 싸돌아댕겨."
종현의 어머니가 한숨을 쉰다. 너는 이렇게 잘 자랐는데 종현이 걔는 왜 그 모양인지... 혀를 끌끌 차는 종현의 어머니에게 종현이처럼 듬직한 아들이 또 어딨어요, 하고 말한 진기는 약은 꼭 하루에 두알씩 챙겨드시라고 당부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같은 겨울인데도 어쩐지 서울보다 날이 더 차게 느껴져 진기는 비둘기색 더플 코트 깃을 세워 올렸다.
추수가 끝나고 벼 밑둥만이 황량하게 남은 채로 꽁꽁 언 논을 지나니 꿈에서도 익숙한 산길이 나온다. 가파르지만 어쩐지 마음이 급해진 진기는 성큼성큼 길을 밟아 올라간다. 잡목들이 무성한데도 길이 잘 나 있어 진기는 조금 안심했다. 무릎에 양손을 얹고 허리를 굽힌 채로 밭은 숨을 내쉰 진기가 고개를 들자 회색 컨테이너 박스가 보였다. 그린벨트 지역안에 몰래 골프장을 짓다 쫓겨난 업자가 남겨두고 떠난 컨테이너 박스는 고등학교 시절 종현과 진기의 아지트였다.
진기는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 언뜻 보기에 별로 변한 건 없었다. 종현이 좋아하는 마이클잭슨 포스터는 빛도 바래지 않은 채로 벽에 붙어있고 종현의 검은색 베이스와 낡은 분홍담요도 아직 그대로.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종현의 뒷모습도 그대로다. 고등학교 규정 컷이었던 머리는 많이 자랐지만.
"종현아."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차가운 컨테이너 박스에 퍼지자 종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왜 왔어, 하고 불퉁하게 말한다.
"너 보러 왔지."
종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진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조금만 추워도 발그레해지는 볼. 아몬드 모양 눈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앞머리. 초식동물처럼 생긴 코. 그리고 아마도 양쪽 볼로 가득 끌어당겨 미소 짓고 있을 입술.
"보고 싶었어."
종현은 늘 진기의 목소리에 무너지고는 했다. 좀처럼 소리를 높히는 일도 흥분하는 일도 없는 진기의 목소리에 가슴이 저려서 종현은 눈을 꼭 감고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었다. 진기가 돌아오는 것을 몇번이나 그려보며 연습했었다. 보고 싶은 만큼 보지 않아야겠다고 더 굳게 다짐해왔으니까 자신 있었는데 진기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종현아."
진기가 종현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렸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눈 앞에 제 상상과 꼭 같은 이진기가 있었다.
연습했던 말을 해줘야 하는데 가슴속에서부터 무언가가 덩어리처럼 목으로 올라와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 앞의 진기가 흐릿해져서 눈을 깜빡거렸더니 알이 굵은 눈물 방울이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울보. 내려가자, 해지면 여기도 춥잖아."
진기가 종현의 볼을 닦아주고는 종현의 손을 잡아 끈다. 여전히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진기의 말랑한 손을 종현은 저도 모르게 꽉 쥐었다.
_
김종현 생축 기념...이라기엔 일년 쯤 전에 쓰다치운 것일 뿐인 조각.
나는 수치를 모르는 누나니까.ㄲㄲㄲ
나는 수치를 모르는 누나니까.ㄲㄲㄲ
'Waiting Room' 카테고리의 다른 글
| Draft II (ing) (0) | 2011/04/08 |
|---|---|
| Draft I (ing) (0) | 2011/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