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28 23:46
Sloppy Fixation
치훈재규
"이재규, 계란말이 마지막인데 내가 먹어도 돼?"
"이재규, 계란말이 마지막인데 내가 먹어도 돼?"
놈은 죽었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놈이 죽은 후 꼭 일년이 되는 오늘, 과연 우리가 놈의 바람대로 괴물이 되었는가, 하면 확실한 답은 할 수 없다. 놈이 추락하던 그 순간, 적어도 그 때만큼은 괴물에 가깝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리고, 또 변한 것 하나.
"먹는다."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치훈이 깔끔한 젓가락질로 재규의 도시락통에서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올린다. 음음... 맛을 음미하는 소리를 내며 우물거리는 치훈만큼은 그 이후로 무언가 변한 것이 확실하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지고 있어 일반적인 사람과 다른 사고 회로를 가진 치훈은 놈을 만나기 전에는 재규를 인지하지도 못 했다. 물론 재규도 로봇과 같은 치훈이 계란말이를 좋아하는 '귀여운' 식성을 가지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지만. 자신의 존재 여부를 인식하지 못했던 치훈과 멋대로 치훈의 성격에 대해 정의를 내린 자신. 둘 중에 구지 나쁜 쪽을 꼽자면 누구일까.
“맛있어?”
재규의 물음에 치훈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응, 하고 대답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행을 가자고 한 거야?”
일반적으로 치훈의 언행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뭐 최치훈이니까, 하며 납득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놈이 죽은 지 꼭 일년, 그리고 윤수의 기일이기도 한 오늘 치훈은 우리 여섯명에게 자신의 집이 있는 대구의 과수원으로 3박 4일 간의 여행을 제안했다. 하지만 은성이는 사건이 종결된 후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수시가 일찌감치 결정된 무열이는 방학이 되자 은성이를 보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미르는 대학에 가면 놀 수 없다는 답잖은 이유를 내세우며 홀로 배낭여행을 떠났으며 영재는 길거리에서 모델로 캐스팅 되어 일반고로 전학하며 아예 집을 나왔는데 일이 잘 되는 모양인지 스케줄 때문에 올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믿었던 강모마저도 은성이도 없는데 사진 찍을 것이 없지 않냐며 오지 않겠다고 했다. 주모자인 주제에 혼자 가도 별로 상관없어, 라는 태도로 일관하던 치훈을 보다 못해 친척들과의 해외여행에서 빠져가며 치훈의 계획에 동참한 건 결국 재규 하나였다.
“너만 올 줄 알았어.”
언제나와 같이 억양없이 밋밋한 치훈의 말투에 재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뭐?! 하고 묻는다.
“유은성 미국 갔으니까 박무열 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양강모는 유은성 때문에 오기 싫다고 거절 했었지. 강미르나 조영재는 너처럼 자기일 취소해가면서 올 타입들은 아니잖아.”
“나랑 둘이서 가면 뭐가 재미있다고...”
작게 중얼거리는 재규의 목소리에 치훈이 피식 웃는다. 최치훈이 웃는 걸 보게 되다니. 재규는 친척들 앞에서 일류대학에 합격한 아들로 유세해보려 했던 어머니를 힘겹게 설득해서 가족 여행에서 빠진 보람은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다.
“도시락 싸올 줄은 몰랐는데.”
“너 계란말이 좋아하잖아.”
주말에는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게 되어있는 수신고에서 재규는 종종 간단한 것을 만들어 먹었다. 빵조각을 물고 있다 보니 밥생각이 나서 조금 늦은 시간에 계란말이에 김치찌개를 끓여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치훈도 배가 고파졌던지 식당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사건이 있고 나서 석달쯤 후였는데 윤수 아버지의 도움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고 조용히 마무리 되어서 내면에서 괴물의 알이 깨어난 건지 어쩐지는 알 수 없어도 학교 생활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재규는 다시 존재감 없이 머릿수를 채우고 있는 전학생으로, 치훈은 감정결핍의 천재로. 함께 8일간을 겪었던 아이들과는 지나가다 부딪히면 눈인사를 하거나 종종 안부를 묻기는 했지만 입시로 바빠졌고 구지 유쾌하지 않은 그때의 이야기로 유대감을 조성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개만 먹어도 돼?’
최치훈의 입에서 한개만, 이라니. 책을 보며 식사를 하던 재규는 너무 깜짝 놀라서 사레가 들렸었다. 그때 치훈이 말하길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계란말이라고 했다. 전기 충격기 같은 복잡한 기계는 잘 만들면서 계란말이는 귀찮아서 도통 만들 수가 없다고 말하는 치훈을 보며 보통사람들과 다르긴 하지만 조금 인간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일 함께 겪었던 그 악몽 같았던 8일간이 없었더라면 치훈은 자신에게 계란말이를 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근데 우리 둘이 가서 뭐하지.”
“재미있게 해줄게.”
핸드폰으로 근처에 뭐 할만한게 있나 검색하던 재규는 기대하지 못한 말에 너무 놀라서 도리어 푸흡, 소리를 내어서 웃고 말았다.
“못 믿겠으면 할 수 없고.”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으쓱한 치훈은 묵묵히 재규가 싸온 도시락에 집중한다. 낮은 기차의 간의 테이블에 맞추어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앉은 치훈을 보자 문득 과학실에서 전기 충격기를 만들며 '편지 네가 썼지?' 하고 묻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것은 물음보다는 증명을 위한 수순에 가까웠고 치훈은 결국 놈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자신이 편지의 발신인임을 말하지 않았었다. 과연 치훈이 아닌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혹은 자신이 치훈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남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이 살 수 있음에도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치훈의 결핍이라는 건 어쩌면 누구보다 그를 도덕적이고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믿어.”
한글자 한글자 힘주어서 말했다. 모두가 괴물이 되어도 너만은 그대로 일 것이라는 걸. 설사 네가 괴물이 되어도 그건 올바른 선택일 것이라는 걸. 믿어.
치훈이 환하게 웃는다. 믿기 힘든 장면을 보면서 재규도 웃었다. 흔들리는 기차 안. 마음 속에서 깨어나는 괴물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소년들은 평화롭다.
드라마를 오랜만에 봐서인지 학원물이라서인지 아무튼 동했다. 재규는 너무 재규재규해. 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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