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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1 00:17 Sloppy Fixation
무열재규





"나는 어쩌면 동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해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좋은지도 몰라."

무열의 말에 재규가 눈을 껌뻑거린다. 그러니까 요는 자신이 동정할만하기 때문에 마음에 든다는 것일까. 아무리 노력해서도 이길 수 없는 최치훈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으니 말이다. 박무열이 적이 되는 것은 달갑지 않으니 열등한 걸 기뻐해야하는 건가. 베개에 턱을 대고 엎드린 채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는 재규의 머리를 한 손으로 헝클어드린 무열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대충 속옷만 챙겨 입은 채로 의자에 걸어둔 바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입에 물고 창문을 열어 젖힌다. 불과 삼년 사이에 무열은 굉장히 변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일등 신랑감인 일류 대학생이지만 적어도 재규의 앞에서만은 여지없이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뒤틀린 욕구, 내재된 욕망, 그리고 놈으로 인해 각성한 본성까지도.

"그럼 은성이는? 전혀 동정할만한 이유가 없잖아. 예쁘고 똑똑하고 밝고."

"그래서 언제든 더 깨어지기 쉬워보였어. 아직 망가지지 않았으니까."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무열의 단단한 등을 보면서 김진수의 그늘에 숨어 모두의 탓으로 돌린 자신보다는 원망할 것이라고는 본인 뿐이었던 무열이 더 안쓰럽다고 생각했지만 재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사실은 치훈이를 버리려고 했었어.”

무열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재규는 금방 알아차렸다. 사건 이후로 종종 대화를 나누게 된 치훈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치훈은 그 때 다리가 부러진 자신을 위해 돌아온 무열을 보면서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인한 자신의 결핍을 처음으로 실감했다고 했다. 눈밭에서 다른 곳도 아닌 다리 부상자를 데리고 돌아가는 무모한 짓은 하지않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치훈은 포기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설사 설원에서 동사를 하게 되었더라도 치훈은 무열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편지에 어떤 식으로도 동요하지 않았던 치훈과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이유는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규가 발신인임을 알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치훈이라면 내면의 괴물을 깨우게 만들었더라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네가 그랬더라도 아무도 너를 원망하지는 못 했겠지만 아무튼 너는 그러지 않았잖아.”

재규의 말에 무열이 피식 웃는다. 재규는 그 모습이 조금 섬뜩하면서도 가엽다고 느꼈다. 감히 존재감조차 없던 자신이 박무열을 위로하는 날이 올 줄이야. 상위 0.1%가 모인 곳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박무열이 고작 그곳에 적응하지 못한 채 죽은 듯 살아가던 자신에게 금이 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열은 꿈에서라도 재규에게 기대거나 손을 내미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재규는 현실감이 없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알에서 부화한 괴물을 숨긴다고 해서 내가 괴물이 아닌 건 아니잖아.”

재규는 무열의 돌아선 등이 안쓰러워서 창가에 선 그의 등을 두 팔 벌려 안았다. 그리고 그때 치훈을 얇은 로프로 끌어올리느라 찢어진 상처가 흉측하게 남은 무열의 손바닥을 펴고 제 손으로 감쌌다. 무열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가 달짝지근하다. 박무열은 아마도 자신을 미워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미워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놈의 말대로 모두가 잠든 괴물이라면 나쁜 건 나야, 박무열. 내가 네 괴물을 깨우는 계기를 제공했으니까. 그러니까 날 원망해. 원망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마음은 편해지잖아.”

늘 비관하게 만들었던 재규의 어중간한 성적은 수신고 밖에서는 여전히 상위 0.1% 미만이었기 때문에 원하던 대학에 무난하게 합격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수신고 출신인 재규와 함께 스터디를 하거나 함께 조별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상대적인 것.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선은 자신을 그토록 괴롭게 했었다. 만나본 적도 없는 김진수가 자신의 분신인것처럼 느껴질 만큼. 그리고 그의 분신이 되는 순간, 나약한 자신을 원망하는 대신 주변에게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면서 용기가 났었다. 검은 편지를 발송하게 만들었던 무모한 용기가. 그리고 자신의 편지를 받고 두려움에 떨던 아이들의 모습은 희열을 느끼게 했다. 그 순간 자신의 안에 잠들어있던 괴물은 이미 깨어났는지도 모른다, 놈을 만나기 전에 이미.

“가끔 그 때 모두 죽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재규의 말에 무열이 몸을 돌려 바닥을 향한 얼굴을 들어올려 시선을 마주한다.

“무슨 소리야?!”

금새 수신고의 박무열로 돌아온 올곧은 남자가 재규의 두 어깨를 강하게 쥔다. 데생같은 섬세한 얼굴에 따뜻한 온기가 번지는 것을 보며 재규는 눈을 감았다. 

“그랬다면 너는 더이상 괴롭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나는 너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지금이 더 좋지만.”

무열은 재규를 잡았던 손을 놓고 대신 터뜨릴 듯 강하게 마른 몸을 안고 입을 맞췄다. 

“이재규, 나는 널 원망할 수가 없어. …불쌍하니까.”

더이상 열등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지만 계속 이렇게 나약한 척, 위태로운 척 연기할 수 있다고 재규는 생각한다. 그래서 무열이 자신은 이재규의 기사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든지. 괴물은,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났다.







 _
다크재규를 원했지만.ㄲㄲㄲ
교정은 나중에.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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