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완디
“오랜만이다.”
잔업이 밀려 눈치를 보다 약속 시간보다 한시간이 지나 도착한 포장마차 안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안 봐도 뻔했을 전개에 동완은 꺼칠한 얼굴을 훑으며 선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단 맑은 액체로 채운 잔을 부딪히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를 건배를 외치는데 셔츠 소매 밑으로 반짝거리는 정혁의 시계가 눈에 띈다. 얼마전에 기고했던 잡지에서 본 모델이었다. 돈이 있어도 연줄이 없으면 구할 수가 없다며 트렌드에 목을 거는 에디터가 페이지를 펼쳐놓고 한숨을 쉬었던 그 시계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정혁의 능력으로는 만질 수 없는 금액의 물건이었고 설령 돈이 있었더라도 물건에 연연하는 타입은 아니니 필시 여자에게 선물받은 것일테다. 문정혁은 그랬다. 본인은 손하나 까딱 않는데 여자들이 늘 꼬여서 피곤하다고. 실로 그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으니 그 체념이 재수없기는 해도 비난할 수는 없었다. 허우대만 멀쩡한 놈이야 찾자면 많았으며 허우대가 멀쩡하면서 지갑까지 두둑한 놈도 널렸는데 거기에 적절한 지식과 매너까지 갖춘 남자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문정혁을 막상 놓고 보자면 성격도 상냥하지 못하고 가진 것은 정말 뭣도 없는, 그나마 껍데기만 봐 줄만한 놈이었다. 타고난 머리는 좋은 편이어서 책 한번 안 펼쳐보고 수도권 대학 문턱을 밟긴 했지만 한학기를 채 못 넘기고 등록금이 없다며 미련없이 그만 두었다. 등록금뿐만 아니라 외제차에 집까지 사주겠다는 여자들이 발치에 몸을 던져도 본체만체하고 질펀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아도 따귀 한 번 맞는 법이 없는 정혁은 세계가 온전히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보일 정도였다.
우당탕-
생각에 빠져있던 동완이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씩씩거리며 잔을 내려놓은 선호가 일어선 등 뒤로 넘어간 접이식 의자가 보인다.
“시발, 꺼져.”
허리를 감아오는 정혁의 손을 뿌리친 선호가 포장마차 밖으로 나가려는 걸 잡아서 말렸다. 야, 왜 그래. 오랜만에 만나가지고. 동완이 중간에서 수습하려 들자 선호가 문정혁 저 개새끼, 뱉어내듯 말하고는 얼굴을 찌푸린다. 요는 그랬다. 아무데도 집착없는 문정혁이 못 가져 안달인 단 하나가 이선호였고 그건 처사에 능한 선호에게도 녹록치 않은 문제였다.
“너보면 엄마 생각나서 그래,” 따위의 유치한 발언을 하면서 엉기는 것도 돌아버릴 판인데 의도가 분명한 손길로 허리를 지분거리는데까지는 인내심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네 엄마 너 낳다가 죽었다며, 기억도 안나는 엄마를 팔고 지랄이야!”
언성이 높아지자 포장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정혁에 비해 덩치는 작아도 힘으로는 지지않는 선호가 기어이 정혁의 볼이 퍼렇게 부어오르도록 한 대 치고 나서야 상황은 종결되었다. 애초에 꼴같잖은 삼류스토리로 늘 시끄러운 시장통의 먹자골목이지만 멀쩡한 사내 셋이 뒤엉켜있는 꼴이야 시선을 충분히 끌고도 남았다. 소주 몇 병과 꼼장어에 대한 값을 치른 동완은 정혁과 선호를 추슬러 포장마차를 나섰다.
“너네 둘 다 언제까지 이럴거야. 차라리 보질 말던가. 이 지랄할 걸 왜 봐. 하아...”
나직하게 지껄인 동완은 한숨을 쉬었다.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면서도 선호가 왜 기어이 셋이 모이는 자리를 거절하지 못하는 것인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았다. 결국 셋이 모이는 건 같은 상처를 안은 사람끼리의 전우애같은 것이었다. 부모 없이 자란 것이 제 잘못인양 짊어지고 살아서인지 햇빛 아래서도 짙게 그늘이 졌다. 동완은 성실해서, 선호는 영악해서, 정혁은 그야말로 잘나서 평범한 척 티 안 나게 지내고 있을 뿐이었다. 제 어두운 구석을 들킬까 조마조마한 가슴을 겨우 내려놓는 건 역시 동류를 만났을 때 뿐인 것이다. 유쾌하지 않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인원의 조합 속에서야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모순적이지만 사실이었다.
“미안.”
정혁의 볼 위로 거뭇하게 변하기 시작한 멍이 씰룩거렸다. 미안한 마음 따위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유아독존인 정혁의 입에서 저런 말이 흘러나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
“알면 됐어.”
웬일로 큰 소동없이 넘어가는 선호가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좋은게 좋은 거지, 생각한 동완이 선호의 등을 토닥거린다.
“그래, 오랜만에 만났잖아. 철우형네 가게 가서 한잔 더 하고 들어가자.”
같은 원생으로 다섯살 위로 체격이 좋아 학창시절부터 빈번하게 싸움에 연류되더니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결국 그쪽으로 일이 풀린 형이 있는데 얼마 전에 가게 하나를 맡았다며 뻑쩍지근하게 대접할 테니 놀러오라는 말에도 번번이 시간에 쫓겨 찾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떳떳하지 못한 장사였지만 그래도 원생 중에는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선호는 더 이뻐졌다?”
요즘은 깍두기라도 잘나가는 회사원하고 차림이 다를바 없다더니 밝은 회색의 이탈리아제 수트에 캬라멜색 수제화 구두를 갖추어 신은 박철우가 룸으로 들어오면서 대뜸 던진 말이 그랬다. 선호는 애매하게 웃고 마는데 인상이 구겨진 건 정혁이었다.
“형은 양아치짓 여전하네요.”
날이 선 정혁의 말을 하하 웃어넘긴 박철우는 블루레이블 양주의 뚜껑을 열고 제일 먼저 정혁의 잔을 채워준다. 말없이 잔을 비우는 정혁을 보며 그제사 동완은 긴장을 풀고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댔다. 만나기만 하면 팔할은 피곤한 일을 구지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제 자신이었다. 티격태격해도 시시껄렁한 농담으로는 죽이 잘 맞는 정혁과 철우는 한시간 남짓을 떠들었고 동완의 옆에 앉은 선호는 술보다는 화려하게 깎은 과일에 집중했다. 과일이 들리지 않은 선호의 빈손이 무릎 위에서 정처없이 배회하는 걸 보면서 동완은 잡아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건 정혁과 동완의 수많은 차이점들 중 하나였다.
조잡하지 않은 인테리어 어딘가에 카메라가 숨어있는 모양인지 철우가 천정 어느 구석을 보며 손짓을 하자 곧이어 웨이터가 룸으로 들어온다.
“애들 좀 데려와봐. 둘, 셋... 선호도 불러줘?”
장난스런 눈을 한 철우를 빤히 바라보는 선호를 대신해 동완은 형 간만에 봤는데 우리끼리 조용하게 마셔요, 대답한다. 새끼, 성실한 건 여전하네. 코웃음을 치면서도 손짓을 해 웨이터를 내보낸다.
“너네는 그래도 사회에서 번듯하게 살아서 내가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
진심이 묻어나오는 말에 가슴이 뭉클한다. 고아원 재정이 어려운 것을 알고 학비며 생활비며 도와온 사람이었다. 검은돈이니 양아치니 하며 비난할 자격 같은 건 거기 세사람 중 누구에게도 없었다.
“원장님은 아직도 행방불명이라며?”
새 술병을 열며 말을 건내는 철우의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저씨, 대치동이요.”
택시를 잡아 일단은 취해서 걸음만 겨우 가누는 정혁을 밀어넣으려니 선호가 차 밖으로 기우뚱 흘러나오는 정혁의 몸을 받치며 아저씨, 대치동 말고 삼성동으로 가주세요, 하고는 저도 택시에 올라탄다.
“너 이사했어?”
동완이 조금 섭섭해하며 묻자 선호가 아랫입술을 깨물어가며 조금 망설인다.
“...나, 정혁이랑 같이 살아.”
어안이 벙벙해져 그저 저를 쳐다만 보는 시선에 민망해진 선호가 얼마 안됐어,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나중에 전화할게, 조심해서 들어가라, 말하고는 아저씨, 가요- 기사를 재촉했다.
택시가 사라진 4차선 도로의 끝을 보면서 허연 입김을 뿜어내며 얼마간을 서있었는지 모르겠다.
“이거 제가 만든 쿠키인데 정혁오빠한테 좀 전해주세요.”
핑크색 쇼핑백을 동완의 손에 쥐어준 여자애가 멀찍하게 떨어져있던 교복 무리에게로 후다닥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동완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못생긴 과자 따위 정혁은 먹을 리도 없었고 제가 누군지는 관심도 없을텐데 고작 이런 것 한봉지 전한 걸로 호들갑을 떨며 들떠서 밤에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잠을 설치겠지.
“너 전해주라더라.”
동완이 건내는 쇼핑백을 받아든 정혁은 내용물을 살피더니 지나가던 일곱살박이 여자애를 불러서 이거 먹어, 하고는 손에 쥐어준다. 아무리 잘 씻겨놔도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인지 어쩔 수 없이 꾀죄죄한데 피부까지 원래 어두운 편이라 마냥 촌애 같았던 정혁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급격하게 변했다. 위험해 보이는 눈빛에 훤칠한 키, 뚜렷한 이목구비는 한번 보면 잊기가 힘들 정도로 잘생긴 외모였고 주변 학교 여학생들이 하교길에 우르르 따라오는 장관이 한동안 계속 되었다. 고아원 안으로 쓱 들어가는 정혁의 등 뒤로는 설마 고아일 리는 없고 봉사활동 하나 봐, 마음씨도 착해, 따위의 가당치도 않은 억측들이 난무했다. 개중에는 사정을 알고도 목을 매는 여자가 여럿이었고 돈을 들고 나타나는 치들도 더러 있었으며 고교시절에는 여대생들까지 대열에 합류해 그야말로 유명세를 치렀다. 학생의 가정환경 파악이라는 목적으로 자행되는 호구조사에서야 질문에 따라 손을 들거나 들지않으면 그만이었지만 문정혁을 보겠다고 고아원 근처에 상주하는 여학생들 무리로 부터 숨기는 어려워 본의아니게 존재가 까발려지게 마련이라 그렇지 않아도 열등감을 부추기는 정혁은 원생들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물론 싸구려 원단의 교복을 입고도 교복 전단지에서 걸어나온 듯한 떼깔을 자랑하는 외모에는 동류로써의 뿌듯함도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시덥잖은 농담이나 헛소리는 잘 지껄이면서도 제 얘기는 별로 없던 정혁이 동완에게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신김치에 꼴에 지단이라고 조촐하게 계란장식이 올라간 국수대접이 올려진 배식판을 들고 동완아, 하고 다정하게 불려진 동완은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날 선호는 장학사의 방문으로 환경미화 게시판 따위를 만드느라 저녁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원생 중에 같은 또래는 일곱이었고 동완, 정혁, 선호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자여서 셋은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고는 했지만 그것은 이선호를 사이에 두었을 때의 일이었다. 동완과 선호는 단짝이었고 정혁과 선호는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에 가까웠다. 정혁과 동완이 부딪히는 일은 대부분 이선호로 기인한 일이었으며 동완은 그것이 유쾌하지 않았다. 사내라면 으레 제 영역을 넘보는 상대에게 적대감을 느끼게 마련이고 그 시기의 남자애들은 더욱 그런 법이라는 것을 치기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특별한 마찰이 없었던 것은 무엇에도 무심했던 정혁의 탓이었을 것이다.
“이선호만 보면 서.”
처음 들었을 때는 급식으로 나온 국수 가락이 코로 나올 뻔 했다. 워낙에 유명했던 터라 여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흔하지는 않아도 간혹 가다 사랑 고백을 해오는 남학생들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별 반응이 없던 정혁이 처음으로 연심을 품은 상대가 하필 이선호라니.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정혁이 선호에게 유별나게 굴었던 것도 같았지만 막 입원했을 때 또래에 비해 덩치도 작고 하얗고 앳된 얼굴의 선호를 귀여워하는 애들은 많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때깔 좋은 옷을 입고 있었고 손을 많이 타며 자랐는지 유난히도 울었던 선호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하얀 반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끌어안고 좁은 이층침대가 빽빽하게 들어찬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거리는 모습은 같은 처지라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정도였다. 정혁과는 다른 의미로 관심의 중심인 것이 바로 이선호였던 것이다. 그래서 티가 안났던 것 뿐이다. 정혁이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흔치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한듯 여겨졌던 것은.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따지자면 오히려 비상한 편인 이선호가 느물거리는 정혁에게 싫은 소리 안하고 지냈던 것 역시 제 특출난 눈치 때문이었을 테다. 실로 덩치도 커서 원생들 사이에서는 대장 격인 정혁의 호의로 선호에게는 여러모로 해가 되는 것이 없었던 것이 사내아이들 간의 주먹다짐으로부터 자유로웠고 또한 여자애들이 갖다 받치는 선물들 중 쓸만한 것은 고스란히 선호의 수중에 떨어졌음에도 여자애들은 정혁에게 속 좁단 소리를 들을까봐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씨발. 조그만 애를 어떡할 수도 없고.”
잔뜩 인상을 쓴 얼굴은 조금 험악한데 젓가락을 꼭 쥔 손가락은 마치 여자 손처럼 고와서 동완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애 한번 사귀어봐. 너 여자를 안 만나봐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시시콜콜하게 제 얘기를 하는 타입이 아니더라도 정혁의 일거수일투족이야 훤히 저절로 꾀게 되고 마는 동완의 해결책은 그랬다. 정혁의 화려한 여성편력은 동완의 권유로 시작된 셈이었던 것이다. 실로 정혁은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고 몰래 담을 넘어 원으로 들어오는 밤이 생겼고 둘의 상담 세션은 그 한번으로 끝을 맺었다. 미묘한 유대감이 생겨나 전보다는 더 살가운 관계가 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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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신화 글이 없어서 올리긴 하는데 중편 비스무리하게만 넘어가도 후달리는 필력이라 더 쓸 수 있을 지는.ㄲㄲ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