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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1/03/28 계란말이

2011/04/19 23:23 Sloppy Fixation
치훈재규








‘...흑체가 적외선을 흡수했다면 가열될 경우 내부의 복사에너지가 다시 빛을 발산하고 그렇다면 흡수된 에너지와 발열 되는 에너지가 동일하다는 빈의 변위 법칙은 성립해야 맞는 것인데 어째서 실험은 가능하고 이론적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거지?[각주:1]'

봄바람이 따뜻해서 강의실에서 드물게 졸기까지 했던 치훈은 봄내음 사이를 헤치고 걸어가며 비몽사몽간에 들었던 양자역학 강의의 내용을 되짚었다. 증명되지 않은 공식이나 현상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당장은 백년이 넘도록 풀리지 않은 이 공식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졌기 때문에 어서 기숙사로 돌아가 증명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싶어져 긴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요.”

누군가 슬쩍 옆에 다가서는 바람에 치훈은 걸음과 함께 생각을 멈추고 조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정수리를 덮은 머리카락 아래로 하얗게 올라온 코끝이 보인다. 손에는 지도가 로딩된 핸드폰이 들려있다. 길을 잃은 모양이다. 가뜩이나 큰 캠퍼스인데 건물들이 다 비슷비슷하다보니 신입생들은 보통 헤매기 마련이었다. 치훈도 일학년 때는 넋을 놓고 걷다가 처음 보는 건물을 마주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그래도 당황스럽지는 않았던 것이 한번 본 지도정도는 좋든 싫든 이미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자신의 말에 빨갛게 달아오르는 귀끝을 보니 아마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가보다, 치훈은 생각한다. 본인에게는 없지만 학습으로 알게 된 감정 중의 하나.

“1학년 기숙사요.”

가뜩이나 길치라서 핸드폰만 믿고 왔는데 뭔가 이상해서요... 하면서 내밀어진 핸드폰에 빨간 화살표가 그려진 곳은 과연 1학년 기숙사동. 나침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길을 잃게 된 모양이었다.

“가는 길인데 같이 가요.”

잠시 잊고 있었던 빈의 변의 법칙이 다시 떠오르자 치훈은 남자에게서 몸을 돌려 걸음을 서둘렀다. 지나치게 큰 캠퍼스는 이런 때에 매우 불편하다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학학, 밭은 숨소리가 들린다. 안내를 맡고 있는 동행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뒤를 돌아보니 이제는 귀끝뿐 아니라 얼굴과 목까지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남자애가 열심히 치훈을 따라 걷다가 멈춰선 치훈을 보고는 살았다, 하는 얼굴로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었다. 보드라워 보이는 하늘색 캐시미어 스웨터 위로 굽은 등의 척추모양이 드러난다.

“키가, 하아, 크니까, 하아, 걸음이, 하아, 빠른가봐요.”

“미안해요.”

말을 하고 보니 별로 미안할 일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그런 말이 나오고 말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면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치훈도, 치훈의 주변사람들도 치훈의 감정결핍에는 익숙해져있어서 새삼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벚나무 많아서 캠퍼스 되게 예쁘다. 사실 공부 잘 하는 애들만 있고 좀 삭막할 줄 알았는데 좋은 것 같아요.”

때마침 부는 바람에 눈처럼 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발을 맞추어 걸어가고 있는데 남자가 말을 꺼낸다. 시선을 맞추며 동의를 구하기에 대충 끄덕여주었다.

“저기, 기숙사.”

초콜릿색 벽돌 건물이 보여서 손을 들어 가리켜주었더니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다지 대단한 건물은 아닌데. 외관도 그렇지만 방음이 제대로 안되는 얇은 벽이라던가 오래 되어서 수압이 약한 화장실 등등 속은 더 부실하기 그지없는데 이 사람이라면 어쩐지 만족하고 잘 지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지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사관 사무실 방향을 짚어주고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하며 꾸벅 인사를 하는 바람에 조금 무안해진 치훈이 결국 입을 열었다.

“동갑일텐데 뭐 그렇게까지...”

치훈의 말에 남자가 동그랗게 뜬 눈을 껌뻑거린다. 어깨 위에 엷은 분홍빛 꽃잎이 몇장인가 올라가있는데 묘하게 어울리는 느낌이 들어 구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럼 같은 일학년?”

“학년은 이학년이지만.”

아, 과학고 출신이구나 석사과정이거나 조교일 줄 알았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혼잣말과 함께 고개도 몇번인가 끄덕거리는 폼이 꽤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귀엽다고 생각해본 건 조숙해서 알 건 다 아는 주제에도 가끔 오빠라고 챙겨주는 여동생들이 다였는데.

사무실로 가려던 남자애가 치훈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으니 걸음을 떼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같이 마주 보고 섰다가 손을 내민다. 난 재규라고 해, 이재규. 앳된 얼굴과는 달리 내밀어진 하얀 손은 의외로 단단한 이십대 청년의 그것이라서 조금 놀랐다.

“최... 최치훈.”

내밀어진 손을 잡고 이름을 내뱉은 치훈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재규는 활짝 웃었다.

“너 꽃잎 묻었다.”

팔을 들어 치훈의 가슴팍에 달라붙어있던 꽃잎을 떼어내 손끝에 올리고 후- 분 재규가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뜬다. 촘촘하게 난 속눈썹이 내려앉은 것을 보는데 어쩐지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소원 빌었어.”

“...무슨 소원?”

“치훈이랑 친한 친구 되게 해주세요.”

장난스럽게 한쪽 눈썹을 올려 찡긋거리는 재규를 보면서 치훈은 처음 느껴보는 알 수 없는 기분을 정의하기 위해 이것저것 감정의 종류들을 떠올려본다.

“너 근데 볼 일 있는 거 아니었어? 되게 빨리 걸었잖아.”

“아...”

잊고 있던 빈의 변위 법칙이 떠올랐지만 어쩐지 재규의 뒷모습이 사무실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치훈은 한참을 그대로 서있었다. 

‘봄이 오면 마음에 흐드러지게 꽃이 핀다.’

시덥잖은 소설이라 생각하며 읽었던 어느 책의 한 구절이 떠올라서 치훈은 왼쪽 가슴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시름시름 상사병을 앓다 죽었는데 납득할 수 없던 그 결말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_
재규재규는 사실 좀 여우._^_
  1. 여기(http://mybox.happycampus.com/ddddark/1887655/?agent_type=naver) 보고 대충 줄여본 것. 말도 안 되는 소리일 확률이 99.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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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2 22:46 Sloppy Fixation
치훈재규







“재규야.”

뒤로 돌아선 익숙한 등을 보자 조금 반가운 마음이 들기에 치훈은 대뜸 이름을 불렀다. 마음먹은 만큼 큰 목소리가 나지 않아 답답해 하고 있는데 재규가 뒤를 돌아보더니 하얀 볼을 붉게 물들이며 치훈에게로 달려와 안긴다. 어찌해야하나 조금 난감해서 엉거주춤하게 벌린 두 팔을 허공에 내젓고 있으니 재규가 야무지게 두팔을 잡아 제 허리에 감아주고는 입을 맞춘다. 순간 온몸이 미끄덩거리는 느낌이 들어 눈을 뜨니 물 대신 글리세린이 가득 담긴 풀에서 푹 젖은 채로 재규와 자신이 손을 잡은 채로 부유하고 있다.





삐비빅-

머리 위로 팔을 뻗어 요란한 기계음을 내는 자명종을 눌러 끈 치훈은 하아,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드디어 했다,
몽정을.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어 감정을 느끼는데는 약간의 장애가 있었지만 그것은 신체적으로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고 오히려 거의 모든 순간에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왔다. 다만 멀쩡하게 변성기를 비롯한 이차성징을 다 겪도록 몽정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 치훈은 조금 걸렸다. 일반적인 자극으로 발기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신체적인 결함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호기심이 들기는 했다. 신체가 발육함으로써 겪게 되는 과정의 일부를 간접경험으로만 접하는 것에 치훈은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감정이 결여되었다고 해서 꿈을 꾸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더러는 황당한 꿈도 있었기 때문에 몽정도 가능할 거라 생각했지만 만일 아스퍼거 증후군으로인해 몽정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거니 하며 포기한 것이 고등학교 2학년의 겨울 방학이었고 이미 창 밖으로는 벗꽃이 한창이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속옷을 물에 행궈 빨래통에 던져넣은 치훈은 샤워기의 뜨거운 물에 몸을 비추다 불현듯 꿈의 한장면을 떠올렸다. 제 입술 위로 부드럽게 포개어지던 붉은 입술. 허리에 감기던 따뜻한 손. 아침의 기운을 빌어 슬슬 고개를 드는 아들내미를 느끼고 손을 가져다 대던 치훈이 멈칫 손을 떨군다. 몽롱한 눈빛을 하고 제게 엉겨붙던 뜨거운 몸이 다름 아닌 이재규였다는 것이 떠오른 것이다.





“안녕.”

식판 위에 노릇노릇 굽힌 토스트와 계란 후라이를 얹은 재규가 우유컵을 입에 물고 있다가 오른손으로 옮겨들며 인사를 한다. 윗입술에 하얗게 우유자국이 묻어있는 것에 손을 뻗으려다 그만두고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묻었어.”

치훈의 말에 한손엔 식판을, 다른손엔 우유를 든 재규는 조금 고민하다 혀를 내밀어 낼름 윗윕술을 훑었다. 바알간 혀가 꼬물락거리는 걸 보자니 어쩐지 아랫도리가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어 치훈은 성급하게 몸을 돌려 배식대로 향했다.

대충 씨리얼이나 먹을 생각이었지만 우유에 말아먹을 생각을 하니 어쩐지 입맛이 동하질 않아 오렌지쥬스와 사과만 집어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최치훈, 하고 부른 재규가 손을 들어 제 옆자리를 가리킨다. 소시오패스 혹은 싸이코패스를 줄여 별명이 패스인 자신이 매사 조용조용한 이재규를 무시하고 방으로 올라가버려도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겠지만 어쩐지 이미 발걸음은 재규의 옆자리로 향한다.

“오늘은 씨리얼 안 먹네?”

딸기쨈을 바른 토스트를 아삭 베어문 재규가 치훈을 본다. 니가 우유를 핥아먹는 걸 보니까 어쩐지 그럴 기분이 사라졌다,는 사설이야 최치훈답게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 묵묵히 사과만 씹었다. 배도 고프지 않으면서 어쩐지 정신없이 먹다보니 심지까지 이빨을 박아넣는 바람에 사과씨도 몇개인가 씹어삼키고 말았다. 발아를 위한 각종 영양소를 비롯 식이섬유까지 씨앗에는 영양분이 많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보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게 되면 유은성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매력을 느끼지는 못 했지만 객관적으로 가장 완벽한 외모였고 교내에서 인기도 가장 많은 여학생이 등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뭐가 유은성이야?”

저도 모르게 생각이 입밖으로 소리가 되어나온 줄은 몰랐던 치훈이 재규가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너도 좋아하는 애가 있긴 있구나... 하는 재규의 목소리에 조금 실망의 빛이 비친 것은 저만의 착각인가, 치훈은 잠시 고민한다. 일반적인 재규의 목소리를 떠올려 볼 때 톤은 낮았고 말의 속도는 느렸다. 아무튼 부정적인 것은 확실한데 비난인지 실망인지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비죽 입을 내민 재규가 먹다만 토스트가 담긴 식판을 들고 일어서더니 먼저 갈게, 하고는 쓰레기통에 음식물을 버리고 위로 올라가버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작은 엉덩이가 계단을 옮길 때마다 움직이는 것이 뭔가 리듬감 있고 보기에 좋아 멍하니 바라보다가 사과를 쥔 손가락을 깨물고서 깜짝 놀라 치훈은 눈을 몇번이나 깜빡거렸다. 생각이 엉킨 아침이 혼란스럽다.

‘이재규는 2학년 때 전학 왔고 짝을 몇번인가 한 적이 있었지. 얼굴은 희고 키는 보통보다 큰 편. 성격은 조용해서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익숙해지면 꽤 수다스러운 면이 있다.’

방에 돌아온 치훈은 책상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특별한 점은 없는데 어째서 몽정의 대상이 된 것인가. 샤프를 손에 꼭 쥐고 꾸벅거리던 옆모습을 보면서 똑바르게 뻗은 코가 부채꼴같다 생각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특기할 사항은 아닌 것 같은데...

반에서 1번부터 떠올리며 재규의 특별한 점을 찾던 치훈은 심각한 표정으로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낸다. 1번은 키가 작다. 그 이상으로는 떠오르는 특기사항은 없다. 그 뒤로 2번부터 15번까지는 주욱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가물가물. 16번이 바로 문제의 이재규. 뒤이은 17번은 성실한 박무열, 그리고 18번부터 27번까지 다시 공백. 28번은 치훈 자신이었으며 맨 끝번인 29번은 정신없지만 머리는 좋은 듯한 강미르.

자신을 제외한 스물여덟명의 같은반 학우 중 인지하고 있는 것은 달랑 셋. 이쯤 되니 제 넓지 못한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등장인물이로구나 납득은 가지만 언제, 왜, 어떻게 이재규를 기억하게 된 것일까. 유명인사인 박무열과 강미르와 차지하고 남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특별한 것이 없는 듯한 이재규. 치훈은 다시 재규를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다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짓더니 기숙사 방문을 잠그고 티슈를 뽑아 침대로 간다.








_
문득 떠올라서 휘갈기고 보니 개그도 이런 개그가 없네. 즈질.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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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6 23:48 Waiting Room
치훈재규





무료했다. 특별히 주변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어려운 수식을 풀거나 설계한 기계를 직접 만드는 일 따위가 즐거움이었던 치훈에게 무료함이란 생소한 감정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견디기 힘들었다. 공식을 앞에 두고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거나 손에 쥔 펜이 움직이지 않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기숙학교라는 환경은 고등학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에게 도전할 기회가 더욱 많은 곳에서 겪는 결핍이 무엇인지 치훈은 쉽게 유추해낼 수 없었다. 다만 유력한 단서라고 추측되는 것은 가끔씩 꿈에 나타나는 이재규 정도.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기어이 말없이 돌아서던 그 날의 뒷모습이 나타나면 꿈인 줄도 모르고 가슴을 움켜쥐고는 했다. 때로는 알 수 없이 뛰는 가슴이 기분 나쁘게 울렁거리기도 했고 때로는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아침처럼 상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양한 감정을 겪어보지 못한 치훈은 이것이 아마도 사람들이 말하는 그리움일까, 짐작할 밖에 수가 없다.

드르륵-

강의실 창밖으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흰 눈처럼 흩날리는 것을 보자 불현듯 떠오르는 지난 밤 꿈의 하얀 얼굴이 주머니에 든 핸드폰의 진동에 일순 사라져버린다.

[나 지금 대전 감.]

강미르였다. 그리고 문자의 저의는 아마도 오늘 치훈의 기숙사에서 자고 가겠다는 이야기일 테다. 고교시절 특별히 친하게 지낸 사람은 없었지만 구지 꼽자면 사이가 나쁜 쪽이었던 강미르는 대학 입학 후에 종종 만나는 몇 안되는 동창이었다. 사이가 나쁘다는 것도 기실 강미르가 일방적으로 치훈에게 적대감을 품었기 때문에 비롯한 일이었을 뿐, 치훈은 강미르의 유별난 행동들이 흥미롭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치훈이 품은 감정은 오히려 호감에 가까웠다. 주변에 둔감한 치훈의 ‘대인관계’에 포함되는 사람은 한 손에 꼽고도 손가락이 두어개 남을 정도로 희박해 자주 붙어있는 바람에 본의아니게 치훈과 친구로 묶여진 미르는 툭 하면 치훈에게 그것을 구실삼아 술이며 밥을 사게 했는데 치훈의 주머니 사정은 여유로웠고 강미르는 유쾌했으므로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치훈은 교수가 엉터리 영어로 횡설수설 밀즈 방정식을 설명하는 것은 듣지 않기로 결정하고 노트를 한 페이지 넘겨 자신이 낸 문제에 집중한다.

두개의 원을 교차되게 그리고 왼쪽에는 강미르를, 다른 쪽에는 이재규라고 적은 치훈이 두 원의 겹쳐진 부분에는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다. 벤다이어그램의 명제는 수신고, 왼쪽 원에는 친구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오른쪽은... 

한참동안 재규의 이름 위를 배회하던 펜은 기어이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하고 노트 위로 쓰러진다. 





장장 세 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자 침대에 엎어져 있는 미르의 다갈색 뒤통수가 보인다. 요즘은 여자친구 비위 맞춘다며 평범한 머리를 했지만 고등학교 때는 빨강, 초록, 노랑, 현란하게 머리를 물들여 댔었다. 그런 미르를 보면서 이재규는 ‘신호등이네...’ 라며 작게 중얼거렸었는데 그것이 분명 부러운 듯한 말투였던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꽤 오랫동안 신경이 쓰였었다. 수학이나 화학공식은 대부분의 경우 반드시 이해가 가는 해답이 있지만 사람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겨우 두 발로 걷게 되었을 무렵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치훈, 친구가 자면 깨워야 술을 먹을 거 아니야.”

둔중하게 느껴지는 등의 통증에 고개를 돌리니 미르가 퉁퉁 부은 눈으로 치훈을 보고 있다. 전자시계가 빨갛게 한참 늦은 저녁시간을 깜빡거린다.

“아 이재규, 사람이 안 오면 전화를 해야지 그냥 기다리냐.”

늦었다는 미르의 재촉에 뭐가 늦었는지도 모르고 차를 몰아 도착한 바의 가장 끝자리에 이재규가 앉아있었다. 겨우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뭐. 속눈썹이 내려앉으며 웃는 얼굴에 묘하게 기분이 상한 치훈은 오랜만이라는 재규의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하며 재규의 자리에서 하나를 건너뛴 의자를 끌어내었다.

“재규 옆에 앉지 왜. 너네 졸업하고 첨 보는 거 아냐?”

미르의 말에 잠깐 재규와 시선이 맞닿았지만 금새 고개를 돌려버리기에 치훈은 그대로 미르를 가운데 두고 앉았다. 시덥지 않은 대학 생활, 고등학교 이야기, 그리고 여자 이야기를 요란스럽게 늘어놓은 건 미르였고 일일이 맞장구를 치는 것은 재규의 몫이었다. 치훈은 둘의 얘기에 반쯤 정신을 두고 나머지 반으로는 끊임없이 교차된 두개의 원을 그렸다.

술자리라면 모이게 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결국은 많이 마시고 취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마는 강미르는 기어이 고주망태가 되었고 뻗어버린 미르를 사이에 두고 치훈과 재규는 한동안 말없이 술을 마셨다. 재규가 몇번인가 자신의 빈 잔을 채울까 말까 망설이는 손짓을 하는 것을 보았지만 치훈은 어찌할 바를 몰라 그만 두었다. 연이은 자작 끝에 입을 먼저 연 것은 재규였다.

“대학 생활은 어때?”

“......”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한 질문이 이재규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적당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치훈은 그저 재규를 빤히 보았다. 아마도 술기운 때문일 발그스름한 볼을 제외하면 변함이 없는 얼굴은 제 꿈 속에서 그대로 걸어나온 것만 같다.

“...난 그냥 그래. 대학도 별거 없더라.”

한숨인지, 그저 조금 요란한 숨인지도 가늠이 안 될 만큼 미약한 소리를 뱉어낸 재규는 다시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잔을 내려놓는 흔들리는 손끝을 보고서야 치훈은 재규가 취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가자.”

치훈의 말에 서둘러 몸을 일으킨 재규가 둔해진 손으로 재킷을 뒤적여 지갑을 찾는 동안 치훈은 값을 치르고 미르의 팔을 감아 부축했다. 장신에다 덩치까지 좋은 미르를 뒷자석에 우겨넣고 나니 땀이 비오듯 흘러 차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나서야 한쪽 팔에 제 외투를 걸치고 선 재규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재규는 치훈의 옷을 내밀었다.

“고마워.”

술기운에 붉어진 재규의 뺨은 찬 밤공기에 겨우 제 색을 찾았는데 이번에는 두 귀가 발갛게 물든다.

데려다 줄게, 집이 어디야, 묻는 치훈에게 재규가 술 먹었는데 운전하려고? 하고 걱정스럽게 묻는다.

“술 좀 깨면.”

차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로 말하는 치훈의 옆에 재규도 나란히 선다.

“넌 더 큰 것 같다.”

“...작은 키 아니야, 너.”

한참 만에 입을 뗀 치훈을 보며 재규는 웃었다. 컴컴하게 내려앉은 밤이 밝다는 착각이 일만큼 환하게.





“재규랑 얘기 좀 했냐?”

별로, 치훈은 대답하며 숙취제거제를 미르 앞에 내려놓는다. 까드득, 뚜껑을 여는 소리가 귓가에 요란하게 울린다.

“이상하네. 걔 갑자기 전화해가지고 너랑 연락하고 지내냐고 묻더라고. 핸드폰 번호 알려줄까 물어보니까 그냥 같이 술이나 한번 마시자 해서 불렀던 건데.”

“......”

“고등학교 때 너네 친하지 않았어? 삼 년 내내 짝이었잖아.”

오로지 공부 이외에는 무심했던 수신고는 교실에서 특별히 자리를 정해주는 대신 학생들이 좋을 대로 자리를 골라서 앉을 수 있었다. 학교 만큼이나 공부 이외의 것에 무심한 학생들은 대부분 신학기 첫날 앉은 자리에 일년 내내 앉게 마련이었고 그것은 치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이재규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입학했을 때 사이코패스 최치훈 옆에 누가 앉을 것인가는 나름대로 뉴스였다고. 이재규처럼 조용한 애가 괜히 유명인사가 된 게 아니야. 감히 네 옆에 앉은 위인이잖냐. 대전까지 내려온다길래 난 또 엄청나게 눈물겨운 재회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술보다 더 쓴 듯, 크- 소리를 내며 숙취제거제를 마신 미르가 다시 벌렁 침대 위로 눕는 것을 보며 치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_
스핀오프가 아니고 보니 마무리가 안 지어진다. 치훈재규는 계속 되어야 하니까?!ㄲㄲㄲ
게으른 주제에 안 하던 짓을 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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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훈재규





놈을 징계방에 가둔 승리를 자축하는 술파티를 벌이고 눈싸움까지 한바탕 마친 후 재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 방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어 섰다. 최근 몇년 사이 이런 식으로 신나게 순간을 즐겼던 적이 있었던가.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의 강한 유대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심장 위에 꽁꽁 언 손을 얹고 창 밖을 내다보던 재규는 불현듯 표정을 굳혔다. 중앙 정원의 하얀 눈밭에 작게 솟은 언덕, 그 아래에는 선생님의 시체가 있다.

“하아...”

축축하게 젖은 옷 때문에 덜덜 떨리는 몸을 양팔로 감싸안은 채 중앙 정원으로 걸어나와 선생님의 시체 앞에 선 재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제와서는 누군가가 김진수를 기억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일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기실 모든 일의 원인 제공자는 자신인데 이런 식으로 함께 즐거워해도 되는 걸까. 무릎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은 재규는 며칠 간 제대로 자지 못해 묵직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순간 두 볼 위로 따뜻한 것이 흐른다 생각했더니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뚝뚝 떨어지는 건 눈물 방울이었다. 수신고에 오고는 단 하루도 울고 싶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그래도 눈물은 나지 않았는데.

“이재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손으로 대충 얼굴을 훔치며 고개를 드니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한 치훈이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다. 만 하루를 감금되어있었던 치훈은 조금 마른 듯 했지만 부리부리한 눈은 어둠속에서도 형형하게 빛이 난다. 나를 알지도 못했던 네가 내 이름을 불렀으니 이제 나는 너에게 가서 꽃이 되는 것일까. 달빛을 등지고 선 치훈을 보며 재규는 제 어이없는 생각에 조금 웃고 만다.

“추운데 뭐해.”

발갛게 곱은 재규의 두 손을 그러 모은 치훈이 제 손바닥 사이에 넣는다. 

“최치훈?”

따뜻한 것이 닿은 손등이 간질거려서 재규는 코끝을 찡긋거리며 의뭉스러운 눈으로 치훈을 올려다보았다. 

“옷 젖었는데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릴텐데.”

치훈은 조금 인상을 쓰며 제 두 손 사이에 있는 재규의 손을 잡고 힘을 주어 끌어당긴다. 꽁꽁 언 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아서 엉거주춤 치훈의 손을 잡은 채로 일어난 재규는 조금 비틀거렸다. 

“들어가자.”

치훈의 재촉에도 재규는 움직이지 않는다. 창문 밖의 재규를 보고 어쩐지 급한 마음이 들어 대충 챙겨입고 나오는 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지만 허옇다 못해 보랏빛으로 질려있는 재규를 그냥 두고 들어가면 안될 듯한 기분이 들어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째서 말하지 않았어?”

재규의 물음에 치훈은 그저 작게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다. 재규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이라면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겠지만 정작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다. 다만 겁먹은 초식동물 같은 눈을 하고 자신을 보던 재규를 보자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놈의 손에 이끌려 사지로 내몰리던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살아있어서 정말 기쁜데 한편으로는 너무 두려워.”

발끝을 보고 선 재규는 군데군데 울음이 섞인 문장을 토해내었다. 떨어진 눈물이 재규의 검은 운동화 위에 동그라미를 연이어 그리는 것을 보면서 치훈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한다.

“너야말로 어째서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지 않아?”

“그야, 난 자격이 없으니까.”

끅끅,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도 망설임없는 대답에 치훈은 재규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일정한 템포의 신체접촉은 긴장을 풀어주면서 안정을 준다, 는 책의 구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효과가 있는 것인지 재규의 호흡은 점점 골라지는데 도리어 치훈은 감금 당했던 동안에도 느끼지 못했던 초조함에 혼란스러운 기분이 든다.

“갇혀있는 동안 식사가 보장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에너지를 무리하게 쓰지 않는 게 당연한데도 나는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았어.”

꼭 쥐어진 주먹으로 젖은 얼굴을 부비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재규의 일렁거리는 눈을 보며 치훈은 말을 잇는다.

“만일 아이들이 알게 된다면 너를 사냥할 것 같았어. 그걸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

“어째서 말하고 싶지 않은 걸까.”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가 없는 말에 재규는 잠자코 있었다. 

“들어가자.”

다시 한번 제 손을 잡아끄는 치훈의 손길을 따라 재규는 발걸음을 옮긴다. 

“...고마워.”

치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춥고 외롭고 두려웠던 마음은 맞잡은 두 손 안에서 녹아내렸다.







_
복습을 하던가 해야지. 디테일이나 타임라인이 가물가물하다. 비루한 뇌용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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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1 00:17 Sloppy Fixation
무열재규





"나는 어쩌면 동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해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좋은지도 몰라."

무열의 말에 재규가 눈을 껌뻑거린다. 그러니까 요는 자신이 동정할만하기 때문에 마음에 든다는 것일까. 아무리 노력해서도 이길 수 없는 최치훈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으니 말이다. 박무열이 적이 되는 것은 달갑지 않으니 열등한 걸 기뻐해야하는 건가. 베개에 턱을 대고 엎드린 채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는 재규의 머리를 한 손으로 헝클어드린 무열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대충 속옷만 챙겨 입은 채로 의자에 걸어둔 바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입에 물고 창문을 열어 젖힌다. 불과 삼년 사이에 무열은 굉장히 변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일등 신랑감인 일류 대학생이지만 적어도 재규의 앞에서만은 여지없이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뒤틀린 욕구, 내재된 욕망, 그리고 놈으로 인해 각성한 본성까지도.

"그럼 은성이는? 전혀 동정할만한 이유가 없잖아. 예쁘고 똑똑하고 밝고."

"그래서 언제든 더 깨어지기 쉬워보였어. 아직 망가지지 않았으니까."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무열의 단단한 등을 보면서 김진수의 그늘에 숨어 모두의 탓으로 돌린 자신보다는 원망할 것이라고는 본인 뿐이었던 무열이 더 안쓰럽다고 생각했지만 재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사실은 치훈이를 버리려고 했었어.”

무열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재규는 금방 알아차렸다. 사건 이후로 종종 대화를 나누게 된 치훈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치훈은 그 때 다리가 부러진 자신을 위해 돌아온 무열을 보면서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인한 자신의 결핍을 처음으로 실감했다고 했다. 눈밭에서 다른 곳도 아닌 다리 부상자를 데리고 돌아가는 무모한 짓은 하지않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치훈은 포기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설사 설원에서 동사를 하게 되었더라도 치훈은 무열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편지에 어떤 식으로도 동요하지 않았던 치훈과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이유는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규가 발신인임을 알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치훈이라면 내면의 괴물을 깨우게 만들었더라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네가 그랬더라도 아무도 너를 원망하지는 못 했겠지만 아무튼 너는 그러지 않았잖아.”

재규의 말에 무열이 피식 웃는다. 재규는 그 모습이 조금 섬뜩하면서도 가엽다고 느꼈다. 감히 존재감조차 없던 자신이 박무열을 위로하는 날이 올 줄이야. 상위 0.1%가 모인 곳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박무열이 고작 그곳에 적응하지 못한 채 죽은 듯 살아가던 자신에게 금이 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열은 꿈에서라도 재규에게 기대거나 손을 내미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재규는 현실감이 없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알에서 부화한 괴물을 숨긴다고 해서 내가 괴물이 아닌 건 아니잖아.”

재규는 무열의 돌아선 등이 안쓰러워서 창가에 선 그의 등을 두 팔 벌려 안았다. 그리고 그때 치훈을 얇은 로프로 끌어올리느라 찢어진 상처가 흉측하게 남은 무열의 손바닥을 펴고 제 손으로 감쌌다. 무열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가 달짝지근하다. 박무열은 아마도 자신을 미워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미워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놈의 말대로 모두가 잠든 괴물이라면 나쁜 건 나야, 박무열. 내가 네 괴물을 깨우는 계기를 제공했으니까. 그러니까 날 원망해. 원망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마음은 편해지잖아.”

늘 비관하게 만들었던 재규의 어중간한 성적은 수신고 밖에서는 여전히 상위 0.1% 미만이었기 때문에 원하던 대학에 무난하게 합격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수신고 출신인 재규와 함께 스터디를 하거나 함께 조별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상대적인 것.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선은 자신을 그토록 괴롭게 했었다. 만나본 적도 없는 김진수가 자신의 분신인것처럼 느껴질 만큼. 그리고 그의 분신이 되는 순간, 나약한 자신을 원망하는 대신 주변에게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면서 용기가 났었다. 검은 편지를 발송하게 만들었던 무모한 용기가. 그리고 자신의 편지를 받고 두려움에 떨던 아이들의 모습은 희열을 느끼게 했다. 그 순간 자신의 안에 잠들어있던 괴물은 이미 깨어났는지도 모른다, 놈을 만나기 전에 이미.

“가끔 그 때 모두 죽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재규의 말에 무열이 몸을 돌려 바닥을 향한 얼굴을 들어올려 시선을 마주한다.

“무슨 소리야?!”

금새 수신고의 박무열로 돌아온 올곧은 남자가 재규의 두 어깨를 강하게 쥔다. 데생같은 섬세한 얼굴에 따뜻한 온기가 번지는 것을 보며 재규는 눈을 감았다. 

“그랬다면 너는 더이상 괴롭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나는 너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지금이 더 좋지만.”

무열은 재규를 잡았던 손을 놓고 대신 터뜨릴 듯 강하게 마른 몸을 안고 입을 맞췄다. 

“이재규, 나는 널 원망할 수가 없어. …불쌍하니까.”

더이상 열등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지만 계속 이렇게 나약한 척, 위태로운 척 연기할 수 있다고 재규는 생각한다. 그래서 무열이 자신은 이재규의 기사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든지. 괴물은,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났다.







 _
다크재규를 원했지만.ㄲㄲㄲ
교정은 나중에.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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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8 23:46 Sloppy Fixation
치훈재규






"이재규, 계란말이 마지막인데 내가 먹어도 돼?"

놈은 죽었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놈이 죽은 후 꼭 일년이 되는 오늘, 과연 우리가 놈의 바람대로 괴물이 되었는가, 하면 확실한 답은 할 수 없다. 놈이 추락하던 그 순간, 적어도 그 때만큼은 괴물에 가깝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리고, 또 변한 것 하나.

"먹는다."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치훈이 깔끔한 젓가락질로 재규의 도시락통에서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올린다. 음음... 맛을 음미하는 소리를 내며 우물거리는 치훈만큼은 그 이후로 무언가 변한 것이 확실하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지고 있어 일반적인 사람과 다른 사고 회로를 가진 치훈은 놈을 만나기 전에는 재규를 인지하지도 못 했다. 물론 재규도 로봇과 같은 치훈이 계란말이를 좋아하는 '귀여운' 식성을 가지고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지만. 자신의 존재 여부를 인식하지 못했던 치훈과 멋대로 치훈의 성격에 대해 정의를 내린 자신. 둘 중에 구지 나쁜 쪽을 꼽자면 누구일까. 

“맛있어?”

재규의 물음에 치훈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응, 하고 대답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행을 가자고 한 거야?”

일반적으로 치훈의 언행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뭐 최치훈이니까, 하며 납득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놈이 죽은 지 꼭 일년, 그리고 윤수의 기일이기도 한 오늘 치훈은 우리 여섯명에게 자신의 집이 있는 대구의 과수원으로 3박 4일 간의 여행을 제안했다. 하지만 은성이는 사건이 종결된 후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수시가 일찌감치 결정된 무열이는 방학이 되자 은성이를 보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미르는 대학에 가면 놀 수 없다는 답잖은 이유를 내세우며 홀로 배낭여행을 떠났으며 영재는 길거리에서 모델로 캐스팅 되어 일반고로 전학하며 아예 집을 나왔는데 일이 잘 되는 모양인지 스케줄 때문에 올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믿었던 강모마저도 은성이도 없는데 사진 찍을 것이 없지 않냐며 오지 않겠다고 했다. 주모자인 주제에 혼자 가도 별로 상관없어, 라는 태도로 일관하던 치훈을 보다 못해 친척들과의 해외여행에서 빠져가며 치훈의 계획에 동참한 건 결국 재규 하나였다.

“너만 올 줄 알았어.”

언제나와 같이 억양없이 밋밋한 치훈의 말투에 재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뭐?! 하고 묻는다.

“유은성 미국 갔으니까 박무열 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양강모는 유은성 때문에 오기 싫다고 거절 했었지. 강미르나 조영재는 너처럼 자기일 취소해가면서 올 타입들은 아니잖아.”

“나랑 둘이서 가면 뭐가 재미있다고...”

작게 중얼거리는 재규의 목소리에 치훈이 피식 웃는다. 최치훈이 웃는 걸 보게 되다니. 재규는 친척들 앞에서 일류대학에 합격한 아들로 유세해보려 했던 어머니를 힘겹게 설득해서 가족 여행에서 빠진 보람은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다.

“도시락 싸올 줄은 몰랐는데.”

“너 계란말이 좋아하잖아.”

주말에는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게 되어있는 수신고에서 재규는 종종 간단한 것을 만들어 먹었다. 빵조각을 물고 있다 보니 밥생각이 나서 조금 늦은 시간에 계란말이에 김치찌개를 끓여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치훈도 배가 고파졌던지 식당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사건이 있고 나서 석달쯤 후였는데 윤수 아버지의 도움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고 조용히 마무리 되어서 내면에서 괴물의 알이 깨어난 건지 어쩐지는 알 수 없어도 학교 생활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재규는 다시 존재감 없이 머릿수를 채우고 있는 전학생으로, 치훈은 감정결핍의 천재로. 함께 8일간을 겪었던 아이들과는 지나가다 부딪히면 눈인사를 하거나 종종 안부를 묻기는 했지만 입시로 바빠졌고 구지 유쾌하지 않은 그때의 이야기로 유대감을 조성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개만 먹어도 돼?’

최치훈의 입에서 한개만, 이라니. 책을 보며 식사를 하던 재규는 너무 깜짝 놀라서 사레가 들렸었다. 그때 치훈이 말하길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계란말이라고 했다. 전기 충격기 같은 복잡한 기계는 잘 만들면서 계란말이는 귀찮아서 도통 만들 수가 없다고 말하는 치훈을 보며 보통사람들과 다르긴 하지만 조금 인간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일 함께 겪었던 그 악몽 같았던 8일간이 없었더라면 치훈은 자신에게 계란말이를 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근데 우리 둘이 가서 뭐하지.”

“재미있게 해줄게.”

핸드폰으로 근처에 뭐 할만한게 있나 검색하던 재규는 기대하지 못한 말에 너무 놀라서 도리어 푸흡, 소리를 내어서 웃고 말았다. 

“못 믿겠으면 할 수 없고.”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으쓱한 치훈은 묵묵히 재규가 싸온 도시락에 집중한다. 낮은 기차의 간의 테이블에 맞추어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앉은 치훈을 보자 문득 과학실에서 전기 충격기를 만들며 '편지 네가 썼지?' 하고 묻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것은 물음보다는 증명을 위한 수순에 가까웠고 치훈은 결국 놈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자신이 편지의 발신인임을 말하지 않았었다. 과연 치훈이 아닌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혹은 자신이 치훈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남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이 살 수 있음에도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치훈의 결핍이라는 건 어쩌면 누구보다 그를 도덕적이고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믿어.”

한글자 한글자 힘주어서 말했다. 모두가 괴물이 되어도 너만은 그대로 일 것이라는 걸. 설사 네가 괴물이 되어도 그건 올바른 선택일 것이라는 걸. 믿어.

치훈이 환하게 웃는다. 믿기 힘든 장면을 보면서 재규도 웃었다. 흔들리는 기차 안. 마음 속에서 깨어나는 괴물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소년들은 평화롭다.






_

드라마를 오랜만에 봐서인지 학원물이라서인지 아무튼 동했다. 재규는 너무 재규재규해. 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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